梁濟安
濟安1860. 4. 9 ~ 1929. 5.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산의병
- · 홍주의병
- · 산남의병
- · 대한광복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전기의병(김산의병)
- · 중기의병(홍주의병
- · 산남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60년 4월 9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 의지리(義旨里)에서 양제구(梁濟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호는 벽도(碧濤)이다. 위로 여섯 명의 누이에 이어 태어난 형제의 장남이었지만, 아우는 어려서 죽었다. 슬하에 아들 한기(漢紀)·한위(漢緯)·한홍(漢洪)·한성(漢晟) 4형제를 두었다.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 및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국가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즈음하여 16세의 소년으로 척사격문(斥邪檄文)을 돌리려 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중단하였다. 1893년에는 동학교단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 실패 후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들고 일어났고 진천(鎭川)에서는 동학교단과 제휴한 민보군(民堡軍)인 진천기군(鎭川起軍)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민보군은 도리어 중앙 정부의 편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었다. 민보군의 살육적인 농민군 탄압에 자극받은 동학 교단은 민보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민보군이 무너지자 김산군(金山郡) 봉계(鳳溪)로 들어가 소모영장(召募營將) 조시영(曺始永)의 휘하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다. 1896년 3월 10일 결성된 김산의병에 참여하였다. 김산의병의 설립 과정에서 김산군의 무기고를 열어 의병들이 무장을 갖추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14일 관군을 만나 흩어진 김산의병이 3월 25일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재기할 때,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김산의병이 해산한 뒤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병(湖左義兵)에 참여하였으며, 호좌의병이 해산한 뒤에는 지례(知禮)의 수도사(修道寺)·선산(善山) 등지를 거쳐 보현산 중턱의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두마리(斗麻里) 에 은거하였다. 1906년 3월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閔宗植)의 권유로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참여하였다. 홍주성을 탈환한 후 홍주군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의병의 요직에 임명코자 하였으나 양반 유생들의 거부로 실현하지 못하자 실망하여 보현산의 두마리로 돌아왔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개되자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무산되자 개별적으로 모금하여 보관하고 있던 의연금(義捐金) 수백 원을 모두 돌려주었다. 1906년 3월 일어난 산남의병(山南義兵)의 대장 정용기(鄭鏞基)를 후원하였다. 1907년 10월 7일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가 순국하고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에 취임하였으나 그마저 11월 7일 체포된 뒤 순국하였다. 이후 최세윤(崔世允)이 의병장에 추대되자 최세윤의 휘하에서 산남의병의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우재룡(禹在龍)·손성일(孫成日) 등과 함께 동화사(桐華寺)에 주둔하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의병장 최세윤이 산남의진의 지역분대(地域分隊) 정예화 작업을 통해 유격전(遊擊戰)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자 영천 서부지역을 맡아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고령유격대(高靈遊擊隊)로부터 엽총 50정을 1,600냥에 입수하였으니 가져가라는 통지를 받고 우재룡(禹在龍) 등이 대구로 가서 교환해 오던 중 붙잡혔다. 이에 보현산 두마리로 돌아와 사립 두마학교(斗麻學校)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신민회의 독립운동 방략에 따라 선각적인 인사들의 해외 망명이 이어졌다. 『양벽도공재안실기(梁碧濤公濟安實記)』에 의하면, 가산을 방매하여 만주로 건너가 안효제(安孝濟)·맹보순(孟輔淳)·양기탁(梁起鐸)·이병옥(李秉玉)·이세영(李世榮)·이상룡(李相龍)·김좌진(金佐鎭) 등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종사하고 있던 독립운동가와 접촉한 뒤 귀국하였다. 1913년 정월 채기중(蔡基中) 등과 함께 풍기(豐基)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만주의 독립운동기지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풍기광복단 조직 초기부터 만주 독립운동기지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15년 정월 풍기광복단의 채기중과 대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박상진(朴尙鎭)을 연결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결성에 중개 역할을 하였다. 즉 만주에서 만난 박상진을 풍기에 있는 채기중에게 소개하여 박상진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와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풍기광복단의 인사를 합류하게 하여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 외에도 대한광복회 결성 초기부터 국내·외를 연결하는 조직의 확대와 군자금 모집에 크게 기여하였다. 장남 양한기는 목수(木手)로 일하며 아버지를 돕는 한편, 보현산 두마리에서 대한광복회의 통신연락을 담당하였다. 차남 양한위도 1913년 2월 15일 채기중의 딸과 혼인하여 풍기에서 대한광복회의 통신연락을 담당하였다. 양한위는 1919년 이후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에 참여하였다. 1919년 10월 경 권태일(權泰鎰)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한 데 이어서 1920년 10월에는 오기수(吳麒洙)·권태일 등과 함께 8,000원의 군자금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송부하였다. 1922년 11월에는 만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단원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두 아들의 배후에서 대한광복회의 통신 연락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재능이 탁월하여 신식직조기(新式織造機)·일영시계(日影時計)·수륜기(水輪機) 등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 관련 기록으로는 『양벽도공제안실기』와 『벽도공수적(碧濤公手蹟)』이 있다. 전자는 아들 양한위가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고, 후자는 양제안이 보현산 두마리에 은거하여 신교육구국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남긴 「권고문(勸告文)」·「연설문(演說文)」·「광고(廣告)」·「권선문(勸善文)」 등을 묶은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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