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면직
吳冕稙1894. 6. 15 ~ 1938. 5.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남화한인청년연맹
- · 한국특무대독립군
- · 맹혈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은강면(銀江面) 상홍리(上紅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이명으로 양여주(楊汝舟)·마중량(馬仲良)·오철(吳哲)·송효춘(宋曉春) 등을 사용하였다. 고향의 양산(楊山)학교 중학부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 경성측량강습소에 들어가 3개월간 수학하였다. 이후 평양 대성중학(大成中學)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1911년 6월 평양 사동(寺洞)광업소 고방(高坊)출장소에서 1년간 측량기술 견습으로 근무하였다. 그 후 사직한 뒤 1919년 1월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구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 진남포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안악지국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21년 11월 김동우(金東宇)와 신의주와 안둥(현 丹東)·텐진(天津)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옛 스승인 김구(金九)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였으며, 김구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허난성(河南省)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경영하는 육군병공창(陸軍兵工廠) 좌도부(銼刀部)에 들어가 1925년 1월까지 근무하였다. 1929년 여름 상하이로 돌아와 백정기(白貞基) 등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점차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였다.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이 북만주에서 활동 중인 한족총연합회의 독립운동 기지건설 운동을 지원할 때, 이회영(李會榮)의 두 딸과 정화암(鄭華岩)·백정기 등 14명과 만주로 갔다. 하지만 한족총연합회의 내부 분열과 공산주의자들의 암살 공격, 일제의 간섭 등으로 1931년 8월 하순 상하이로 돌아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류자명(柳子明)과 상하이 난샹(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가서 인근의 독립 가옥에서 동지들과 동거하면서 기관지 『자유』 발행에 참여하였다. 1933년 3월 ‘한국독립 선포 기념일’을 준비하며 이용준(李容俊)의 집에서 유인물을 작성 배포하고, 그해 4월 메이데이 선전물도 배포하였다. 1933년 3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암살 계획에도 참여해 폭탄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이회영을 밀고한 혐의를 받는 이규서(李圭瑞)와 연충렬(延忠烈)을 난샹역(南翔驛) 근처로 유인해 처단하고, 일본 총영사관의 밀정으로 활동한 이종홍(李鍾洪)을 사살하였다. 나아가 상해 한인교민단의 거물 인사로서 일제 밀정노릇을 한 옥관빈(玉觀彬) 처단에 참여한 후, 한인제간단(韓人除奸團) 명의로 죄상을 폭로하였다. 1933년 10월 김구의 한국특무대독립군 조직에 참여하였다. 특무대 대장인 김구의 비서로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등에게 중국어와 수학 등을 가르치며 지도하였다. 이후 김구 세력과 결별하고 김동우와 상하이로 가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복귀하였다. 1936년 2월 청년들을 모아 별동대로 한국맹혈단(韓國盟血團)을 조직하고,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자금을 모아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후 한인 자산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다가 1936년 3월 5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과 일제 경찰 수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938년 5월 16일 평양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