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우
延基羽186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강화분견대
- · 13도창의대진소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2)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연기우 의병부대)
- ·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장(1962) 경기도 삭녕군(朔寧郡) 석교리(石橋里)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65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곡산(谷山)이고, 초명은 민우(敏宇)이다. 한자를 달리한 연기우(延起羽)·(延基宇)와 연기호(延基浩), 연봉렬(延奉烈) 등의 이명이 있다. 대한제국 군대 강화분견대에서 부교(副校)로 근무하던 중, 1907년 7월 31일 서울에서 군대해산 소식이 들려오자, 그해 8월 2일 전 강화진위대장 이동휘(李東輝)의 주도로 전등사(傳燈寺)에서 지홍윤(池弘允)·김동수(金東秀)·유명규(劉明奎) 등과 함께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1907년 8월 11일 강화분견대 해산이 예정되었으나, 8월 9일 일제 헌병에 의해 해산식이 앞당겨졌다. 소대장 민완식(閔完植)의 집결 명령을 듣고 해산식에 부교 신분으로 참석하여 “기착” 구령을 외치고 전달 사항을 들었다. 소대장이 서울의 시위대 해산 결과를 알리고 군명(軍命)에 복종할 것을 전하며 급료와 여비를 나눠주고 무기 및 군복 반납과 해산을 명령하자 군인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반발하였다. 병사 하정도(河正道)가 무기고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참교(參校) 유명규·지홍윤 등과 함께 해산 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 봉기를 주도하였다. 50여 명의 해산 군인과 주민 500여 명의 호응을 얻어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파출소를 습격하여 순사를 처단하였다. 8월 10일 기관총 2문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서울에서 파견되어 갑곶에 상륙하였다. 이때 강화분견대 해산 군인 50명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6명을 처단하고 5명에게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으로 인해 수세에 몰려 강화읍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8월 11일 일본군이 강화읍을 공격하자 해산 군인들과 함께 대응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피신하였다. 강화도에서 철수한 뒤 지홍윤 등과 함께 해서지역과 임진강 일대로 이동하여 활동을 지속하였다. 먼저 해산 군인과 주민들을 이끌고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덕물포(德物浦)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가의 존망이 눈앞에 닥쳤으니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또한 각자 성격에 맞게 의병부대의 부서를 정하고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엄정한 군율을 세워 결사 항전을 벌일 것을 맹세하면서 부대를 정비하였다. 1907년 가을부터 임진강이 흐르는 연천과 파주 적성 등지에서 김규식(金奎植)·권중설(權重卨)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말 중부지방에서 허위(許蔿)·이인영(李麟榮)·이은찬(李殷瓚)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 진공을 위해 전국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楊州)로 집결할 때 동참하였다. 같은 해 1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결성되었다. 12월 회의를 열어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자 대대장으로 참가하였다. 1908년 1월 말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였으나, 김규식과 함께 부상을 입고 붙잡혔으나 탈출하였다. 13도창의대진소 해산 이후 임진강 유역의 허위와 연합하기 위해 마전(麻田)과 장단(長湍)을 중심으로 창의존양군수부(倡義尊攘軍帥府)·동한창의존양대장(東韓倡義尊攘大將)·창의한북대장(倡義漢北大將) 등의 의병부대를 구성하여 아장(亞將) 제갈윤신(諸葛允信), 중군장 김중운(金仲運)·원철준, 좌익장 임학도, 우익장 송병태(宋秉泰)·이수영, 선봉장 연성칠(延成七)·심상근, 보호장(保護將) 홍원유(洪元裕), 중대장 이우석(李愚錫)·정제환(鄭濟煥), 별무관(別武官) 홍천희(洪天喜) 등과 함께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의병 항쟁을 지속하기 위한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각 군의 면장들에게 군자금 조달 명령서를 발부하고 부호들에게 군수전(軍需錢)을 요청하였으며, 통과하는 마을이나 각 면에는 옷이나 짚신의 제공 등을 부탁하여 부대를 강화하였다. 효과적인 의병항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허위·김규식을 시작으로 강기동(姜基東)·이진룡(李鎭龍)·김수민(金秀敏) 등의 의병부대와도 유기적인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특히 강기동·이진룡과 더불어 일본군에게 “삼괴(三魁)”로 불릴 정도로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경기 북부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정세 파악을 위해 수시로 정보원을 서울로 파견하였고, 1909년 4월경 김수민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서울 진공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 해 8월경 삭녕수비대장이 회유와 귀순을 유도할 목적으로 면담을 요청하였지만,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폐기하고 각지 주둔 군대와 병참기지를 철폐한 이후에 면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1910년 3~4월 일제가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의 의병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중군장 김중운과 선봉장 연성칠 등이 전사하는 등 전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철원에서 한때 붙잡혔으나 구출되기도 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의병 활동을 펼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1년 12월 28일 발행된 『매일신보』에 12월 23일 부하 3명과 함께 경기도 가평 북방의 화악리(華岳里) 부근에서 가평군 파견소의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중 총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그 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소식이 없다가, 1914년 6월 23일 자 『매일신보』에는 6월 14일 강원도 인제분대 암점파견소 헌병들에게 부친 연성한(延成漢)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로 인해 정확한 사망 시점은 특정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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