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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吳鼎鉉

1888. 7. 4 ~ 1960.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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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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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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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양양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2) 1888년 7월 4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상광정리(上光丁里)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이웃 마을인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其士門里)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기사문운동’으로도 불리는 이 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한 사람들은 원일전리(元日田里) 박원병(朴元秉)·박규병(朴奎秉) 등의 유학자들과 상광정리 감리교회 소속 청년 오세옥(吳世玉)·이응렬(李應烈)이었다. 이들이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주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던 마을 유지 임병익(林秉翼)과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받으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임병익은 면서기로 일하면서 연락 문서를 담당하였고, 이응렬과 포수(砲手) 김종대(金鐘大)가 연락 책임을, 김우근(金禹根)·김진혁(金振赫)·박용기(朴容埼)·김두칠(金斗七) 등 현북면의 구장(區長)들이 주민 동원과 태극기 제작을 맡으며 시위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논의 결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펼치기로 하고, 1919년 4월 9일 양양읍 장터를 거사일과 장소로 정하였다. 만세운동 준비 중 박원병과 박규병 등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처음 계획한 대로 추진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9일 아침, 양양읍이 아닌 면사무소가 있는 하광정리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서 주민들을 모두 모아 양양읍으로 가려고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면사무소에 마을 주민들이 모이자 먼저,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 주변을 돌며 만세운동을 펼친 이후, 양양읍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양양읍에 일본이 병력을 증원하고 있다는 소식에 거사 장소를 기사문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로 변경하였다. 경찰주재소는 면사무소와 10여 분 거리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있는 곳이었다. 기사문리로 행진하는 동안 주도자들과 같이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행진하였고,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주재소 앞 다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군경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의 제지에도 주재소를 향하였고, 그때 군경들의 총탄이 시위대를 향하여 날아왔다. 무자비한 총격에 고대선(高大先)·김석희(金錫熙)·문종상(文鐘祥)·이학봉(李學奉) 등 9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으며,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탄에 시위대는 흩어졌으며, 사태가 진정된 이후 군중들과 같이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면서 귀가하였다. 이후 만세운동 주도자로 붙잡혀 1919년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0월, 벌금 30원, 노역기간 30일을 받았다.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20년 3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8월(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 산입)을 받았으며, 소요죄는 무죄를 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이듬해 영친왕의 혼인으로 사면을 받아 4월 28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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