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선
吳昌善1884. 1. 12 ~ 1974. 9.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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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4년 1월 12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양성면(陽城面) 덕봉리(德峰里)에서 태어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직업은 농민으로 출생 이후 줄곧 안성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1일 저녁부터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元谷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안성 지역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일어난 서울 만세시위에 영향을 받아 3월 11일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이후 약 2주 정도의 기간이 지나 3월 28일~3월 29일을 기점으로 다시 원곡면과 읍내면(邑內面)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3월 31일에는 읍내면 안성시장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양성면에서 4월 1일 저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날 시위대에 참여하여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손정봉(孫正奉)·이희봉(李熙鳳) 등과 함께 양성면으로 행진해 동항리(東恒里)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 날 원곡면에서 출발한 시위 군중은 양성면 동항리로 행진하여 양성면민과 합류하였다. 약 2,000명 규모로 늘어난 많은 시위대 인원들은 다음날 새벽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군중은 횃불을 들고 구한국기 깃발을 앞세우면서 양성면과 원곡면 일대를 돌면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4월 1일 밤 10시 무렵, 시위 군중과 함께 양성면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시위 군중은 주재소의 각종 문서와 기물들도 불태웠다. 뒤이어 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로 향한 후 우편소의 각종 물품, 전화기 등을 파괴하고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시위 군중은 일본인 상인과 일본 대금업자를 공격하였고 양성면사무소의 서류와 물품을 파괴하고 불 태웠다. 이에 주재소의 순사들이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많은 군중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시위대는 마지막으로 새벽 4시경 원곡면사무소까지 공격하고 해산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붙잡힌 후 이른바 내란죄로 기소되었으나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내란죄의 적용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본 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이관하였다. 하지만 8월 20일 경성지방법원은 절차상의 이유로 본 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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