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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춘도

元春道

1886 ~ 194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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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원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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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신천(信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신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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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신천군 문화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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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용진면(用珍面) 사문리(士文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3세로, 1886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개신교 교회 목사로 재직하였으며, 3월 11일 신천군 문화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국내 천도교·개신교·불교 인사들은 독립선언서 선언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으로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월 11일 문화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1일 문화면 만세시위는 개신교회 조사(助事) 최현식(崔賢植), 포목상 강성모(康成模), 잡화상 강영탁(康榮鐸), 한의업에 종사하는 임도성(林道成) 등이 주도하였다. 개신교인들로 주로 구성된 3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동각리(東閣里)에 위치한 문화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고,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헌병대가 전날 붙잡힌 인사들을 석방하면서 시위군중과 함께 해산하였다. 하지만 재령헌병분대(載寧憲兵分隊)에서 헌병 3명을 지원받고, 보병의 파견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시위를 주도한 인사와 참여자들을 색출해서 연행할 때, 함께 붙잡혔다. 일제 측의 모진 조사를 거친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방법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정의와 인도를 존중하고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2천만 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외친 행동은 정당하다”면서 다시 상고하였다. 하지만 그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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