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璣永
璣永1889. 2. 16 ~ 2005. 12.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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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9년 2월 1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구룡동(九龍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박재식(朴載植) 등이 주도한 안동군 편향시장 만세운동은 안동군 만세운동 열기가 고조될 무렵 일어났다. 3월 15일 유연성의 주도로 편항시장 공동 타작장[인낙장(籾落場)]에서 모인 사람들은 3월 21일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기 위하여 임동면 지역을 나누어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인근 임동면 주민들 사이에서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펴졌고,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주저 없이 동참을 결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거사 당일 아침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는 장터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인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오후 2시경 유연성이 장터 중앙으로 나와 군중들에게 연설을 시작하였다. 유연성은 군중들에게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동참을 제의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외침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소리가 장터에 울려 퍼지자 시장에 온 사람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군중들이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 장터에서 시위 열기가 높아질 때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만세시위를 저지하는 일제 경찰에게 배태근(裵太根)이 저항하자 일제 경찰 한 명이 배태근의 뺨을 때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들과 함께 고함치며 “저놈 죽여라”하고 일제 경찰에게 달려갔다. 분노한 군중들의 기세에 일제 경찰은 달아나 주재소로 도망쳤다. 사기가 오른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유연성·배태근·조학이(趙學伊) 등이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고,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이른 시위대는 해산을 명령하는 일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권총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일제 경찰에게 조학이·유곡란(柳谷蘭) 등이 분노하여 달려들었다. 시위대와 함께 돌과 몽둥이로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가 주재소 벽과 창문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집기를 파괴하고 장부와 서류도 모두 파기해 버렸다.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총검과 주재소 안에 비치된 총탄, 대검은 모두 모아 주재소 우물에 버렸다. 유교희(柳敎熙)·유동환(柳東煥)·배혁모(裵赫模) 등과 함께 오카다(岡田健一) 순사의 숙소로 몰려갔다. 숙소에 이르러 벽과 창문 등을 부수고 숙소 안의 침대와 의자, 의복 등도 모두 모아 버렸다. 주재소와 경찰 숙소에서의 격렬한 시위를 마친 후 일부 군중들과 귀가하였다. 남은 시위대는 기세를 몰아 면사무소로 향하였으며, 면사무소를 거의 초토화한 후에 모두 해산하였다. 다음날부터 시작된 일제의 만세운동 관련자 검거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다. 같은 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되고 그대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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