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목
兪鳳穆1898. 12. 19 ~ 1945. 2.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여수청년회
- · 여수노동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여수군 청년회
- · 여수읍 시위 계획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12월 19일 전라남도 여수군(麗水郡) 여수면(麗水面) 동정(東町) 종포(鍾浦, 현 여수시 종화동)에서 태어났다.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과 서울에서 지냈다. 1919년 8월 서울에서 『독립신문』을 습득하였는데, 신문에서 한국 독립을 다룬 기사를 읽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같은 해 9월 여수로 귀향하여 여수읍내의 청년회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청년회가 해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11월 17일 여수군수 안창선(安昌善)에게 “‘여수청년회 조직에 반대하여 이를 해산시켰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처사이며, 너는 대한국독립에 반대하였으니 살해하겠다. 만일 살해되기 싫으면 속히 군수직을 퇴직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1919년 12월 12일 여수수산학교(麗水水産學校) 기숙사에서 이선우(李善雨)·김동렬(金東烈)·하재학(河在學)·유함사(兪咸四)·유병옥(兪丙玉)·김주봉(金柱奉) 등에게 “여수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동포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시기가 늦었다고 유함사가 반대하자 “결코 늦지 않았으며 12월에는 조선 독립이 달성된다고 신문에 보도됐으니 그리 알고 거사할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다른 군(郡)에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이선우의 찬성으로 12월 20일 여수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여수보통학교와 여수수산학교의 학생과 졸업생 중에서 의지가 굳센 사람을 중심으로 위친계(爲親契) 가입을 권유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는 이선우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12월 19일 위친계에 가입하기로 서명한 하재학 외 39명이 여수면 동정 종포에 모이자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모든 참석자들은 12월 20일 장날에 태극기를 흔들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손을 들어 찬성하였다. 12월 19일 밤 여수면 덕충리(德忠里)의 김여종(金汝琮) 방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시위 계획은 실패하였다. 192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협박으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1929년 3월 19일 “노동자의 생활 안정, 여수에 거주하는 노동자의 통일과 지방 미풍을 보지(保持)”할 목적으로 창립된 여수노동조합의 평의원에 선출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3월 29일에 열린 여수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위원으로 뽑혔다. 같은 해 11월 여수축항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지급 등을 요구하면서 동맹파업을 벌이자 여수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파업단의 통제위원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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