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琫承
琫承1901. 2. 11 ~ 1956. 3.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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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1년 2월 11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설천면(雪川面) 진수리(眞水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유승운(柳承運)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3~4일 남해군 남해면 읍내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남해군 만세운동은 3월 20일 남해 읍내 만세시위 이후, 4월 2일부터 6일까지 고현면(古縣面)·설천면(雪川面)·남해면 읍내 시장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에도 4월 3일과 4일에 걸쳐 정학순(鄭學淳)·정몽호(鄭夢虎)·윤주순(尹柱舜)·유찬숙(柳贊淑) 등과 함께 주도한 남해면 읍내 만세시위는 그 규모와 격렬함에 있어서 남해군을 대표하는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남해군 만세운동은 인근 하동군(河東郡) 만세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3월 18일 하동군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범호(李範鎬)·정재운(鄭在雲)·정희근(鄭禧根) 등은 남해로 들어와서 3월 20일 남해군 최초 만세시위를 직접 전개하였다. 4월 3일 설천면에서 시작하여, 4일 읍내 시장의 만세시위로 확산된 남해군 읍내 시위 역시 설천면 문의리(文義里)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 가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받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하동군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이 직접 제작한 것이었다. 이예모는 남해군 내에서 평소 뜻을 같이하던 인사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공유하며 만세운동을 제안하였다. 정학순·정몽호 등과 함께 적극 동의하였고, 이예모의 집에서 이루어진 거사 준비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그리고 시위대 맨 앞에 세울 큰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 작성, 군중 동원을 위한 각 동리별 연락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설천면 남양리(南陽里)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만세시위를 개시하였다. 이예모가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과 함께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이후 군중이 대열을 지어서 군내 중심지인 남해 읍내로 이동할 때에도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중에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이곳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읍내 경찰주재소에 만세시위를 밀고한 것이 드러났다. 시위 주도 인사들과 회의하여 읍내 진출을 보류하고 일단 해산을 결정하였고, 장날인 다음날 4월 4일 읍내 시장에 모여서 다시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4일 윤주순·정몽호·정학순 등 시위 주도 인사들과 함께 읍내 시장으로 갔다. 전날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속속 집결하였고, 장날이라 일반 군중도 많이 모여들었다. 장터 한가운데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붐비는 오후 2시경부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전날 설천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주도 인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따라 불렀고, 장터는 일순간에 군중에게 장악되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읍내 중심가를 행진하였고, 이어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적 기관들로 향하였다. 건물 앞에서 단순히 만세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위대를 지휘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 기물과 집기를 파손하고 직원들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대상이 된 기관들은 경찰관주재소·군청·금융조합사무실·우편국·공립보통학교 등이었다. 특히 농민수탈의 상징인 금융조합 직원들을 읍내 시장으로 데리고 와서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군청에서는 시위 군중들로 뜰을 가득 메운 상황에서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세시위의 열기가 뜨거워졌으나, 사천(泗川)경찰서의 지원 병력이 시위대의 강제 해산을 위해 도착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두르며 야만적인 진압에 나섰고, 결국 시위대는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시위 군중이 흩어지자, 일제 경찰들은 주도 인물 색출에 나섰다. 정몽호·윤주순·정학순 등을 포함한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시위 주도자로 붙잡혔고, 모진 고문을 동반한 혹독한 조사를 거친 후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부산감옥 진주분감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8월 7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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