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相禹
相禹1894. 10. 18 ~ 1948. 1.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강계청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강계군 강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94년 10월 18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금융조합 서기였다. 4월 8일 강계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강계 지역의 만세운동은 학교의 교원과 학생,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1919년 3월 15일 밤 강계 읍내 각소에 ‘한국독립만세’라고 적힌 지편(紙片)이 살포되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평온하였다. 그러나 물밑에서 영실중학교 교사 김경하(金京河), 동료 교사 정준(鄭儁), 교회 장로이자 명신학교 학감 한봉민(韓奉珉) 등이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실중학교 학생들도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학생들이 먼저 만세시위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지만 김경하가 때를 기다릴 것을 주문하며 만류하였다. 김경하 등은 서서히 강계 내 여러 인사들을 접촉하였는데, 당시 금융조합 서기로 일반 유지를 대표하여 만세시위 개최를 논의하였다. 3월 24일 21명의 동지가 모여 첫 회의를 갖고,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시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연판장에 서명 날인하였는데, 이 때 함께 서명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5일 구체적인 만세시위 준비 작업을 논의하였다. 태극기는 영실중학교 학생들이 2,000장을 제작하였고, 독립선언서는 계례지병원(桂禮知病院)에서 2,000장을 등사하고 병원 지하실에 숨겨두었다. 준비를 마친 후, 4월 8일 11시 미리 약속한 대로 강계 읍내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학생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장날에 온 사람들도 시위에 합류하여 수천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문 방면에서 출발하여 북문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헌병분견소를 지나 북문에 다다랐을 즈음, 갑자기 헌병들이 총칼을 들고 군중을 위협하였고 북문 성루 위에서 수비대가 총을 쏘았다. 이때 정준을 비롯한 4명이 그 자리에서 총격으로 숨졌고 다수의 부상자도 나왔다. 이후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로 29명이 체포되었는데, 이 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0년 9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제(聯通制)에서 강계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활동하다 일제에 다시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였다. 이후에도 강계 지역 유지로서 물산장려회 이사, 1923년 5월 강계청년수양회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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