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熙哲
熙哲1893. 3. 13 ~ 1942. 8.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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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3년 3월 13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선두리(船頭里,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기독교 감리회 신자였으며, 직업은 선원(船員)이었다. 3월 13일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현 강화군 강화면) 읍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의 주도자인 유봉진(劉鳳鎭)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고향으로 피신한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黃道文)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입수하고, 황도문과 함께 강화군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만세운동을 궐기하기로 결의하여 평소에 신뢰하고 있던 동료 신자들을 소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3월 5일과 6일 자택에 방문한 유봉진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고,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맹세하였다. 유봉진·염성오(廉成五)·황윤실(黃允實)·황일남(黃一男)·조상문(曺尙文) 등과 함께 3월 18일 읍내 장터에서 궐기하기로 정하고, 온수리(溫水里)의 감리교회당에서 독립선언서와 「강화인민에게」, 「독립가」 등의 문서를 등사하였으며, 강화군 내의 마을들을 순회하며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였다. 3월 17일 황윤실·황일남·조상문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운동 당일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인솔하기로 결의하고 연판장에 서명한 다음, ‘결사대’ 문구가 쓰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운동 당일인 3월 18일 오후 2시경 부내면의 읍내 장터에서 다른 결사대원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던 중, 시장을 경계 중이던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때 시장에 모인 강화군 주민은 10,000명에 달했고, 이들은 유봉진의 인솔에 따라 만세를 외치며 군청과 주재소를 포위한 다음, 장터에서 체포된 동지들의 석방과 친일파 한국인 경찰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시위대의 요구로 다른 결사대원들과 함께 풀려나 만세운동 대열에 재합류하여 밤 11시까지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인천의 경찰들과 서울 용산헌병대 병력을 지원받아 강화군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검속하여 만세운동 참가자를 연행하였다. 이를 피해 하도면(下道面) 내리(內里,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내리)에 있는 박희로(朴熙魯)의 집에서 은신하던 중, 5월 9일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고,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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