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오광심

吳光心

1910. 3. 15 ~ 1976. 4. 7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광심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북 선천(宣川)광복군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선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혁명군
  • · 민족혁명당
  • · 광복군총사령부
  • · 광복군 제3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농건동(農建洞)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여, 싱징현(興京縣) 왕칭먼(旺淸門)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만주의 항일무장투쟁단체 정의부(正義府)에서 설립한 학교였다. 1929년 화흥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퉁허현(通化縣) 반라베이(半拉背)에 있는 초등학교인 배달학교(倍達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1년에는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에 있는 정의부 소속 동명중학(東明中學) 부설 여자국민학교로 옮겨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교직을 사직하였고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軍需處)에서 복무하였다. 또 조선혁명군 유격대와 한·중 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하여, 지하연락 공작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 평생 동지이자 부군(夫君)이 된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학규(金學奎)를 만났다. 1934년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는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부족한 인력과 물자의 원조를 요청키로 결정하였다. 1934년 5월 초 조선혁명당 및 조선혁명군의 대표로 선임된 김학규와 농사꾼 부부로 변장하고 난징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우선 안둥(安東)에서 배를 타고 칭다오(靑島)까지 간 후 비밀공작원의 도움을 받아 난징에 도착하였다. 이후 김학규를 도와 관내지역 독립운동가들에게 조선혁명군의 대일작전 상황과 인력을 비롯한 물자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 청년들의 군사훈련 및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의 경과 등 관내지역 상황을 만주 조선혁명당 본부에 보고하기 위해 김학규가 작성한 보고서 전달 임무를 맡았다. 당시 김학규가 작성한 보고서를 통째로 외운 다음, 1934년 7월 15일 난징을 출발하여 만주의 조선혁명당 본부에 보고하였다. 이때 변절자의 방화로 가옥이 불탔고, 산간의 바위굴에서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다. 1935년 1월 다시 난징으로 가서 단일당 조직운동에 대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비준서를 전달하였다. 1935년 7월 4일 단일대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설되자,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39년 2월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의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김정숙(金貞淑)·지복영(池復榮)·조순옥(越順玉) 등 여성 대원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후 총사령부의 사무를 비롯한 선전활동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총사령부가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이동한 뒤에는 지복영·조순옥 등과 광복군총사령부 선전조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 기관지인 『광복』 창간호 한국어판에 「한국 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이라는 글을 실어 항일독립사상과 여권 평등 실현에 대한 방략을 제시하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30년 동안 조국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국내와 만주 그리고 관내에서 맹렬한 활동을 이들은 주로 남자 동지들이고,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럽다고 기록하였다. 또 남녀평등과 여권(女權)을 찾으려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져야만 하며, 지금 여자들에게 그 기회가 왔다고 강조하였다. 시안에서 1년 반 동안 『광복』 간행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군 제3지대를 따라 산둥(山東)반도로 이동하여 초모공작(招募工作)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산둥 반도로 향하던 중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정착하였다. 푸양에서 제3지대 지대장 김학규의 참모이자 기밀담당 비서로 활동하였다. 푸양 활동 중에 광복을 맞은 후 김학규와 상하이(上海)로 가서, 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滬辦事處)에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3만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46년 가을 김학규와 선양(沈陽)으로 가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광재⋮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