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수
吳麒洙1892. 9. 25 ~ 1959. 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 · 독립신문 배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2년 9월 25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읍내면(邑內面) 후죽동(帿竹洞)에서 오학순(吳鶴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호는 남파(湳波)이다. 1912년 경성관립공업전습소(京城官立工業傳習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측량과(測量課) 기수(技手)로 근무하였다. 1914년에 기수직 사임 후 의성경찰서 순사보(巡使輔)로 근무하였다. 평소 일제의 지배 아래 고통 받는 한국인의 현실을 안타까이 여기며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의성 지역에서도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드디어 한국 독립의 때가 왔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총칼을 앞세운 일제 경찰의 폭력과 강압에 만세시위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죽음을 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직업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한국이 반드시 독립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며, 독립투사가 되어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들을 규합한 뒤 중국 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간도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청원하여 참가국들의 승인을 받도록 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의성군 의성읍내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 마춘성(馬春成)에게 “금년 봄 이래 조선 민족은 각지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일으켜 그 때문에 투옥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상자도 적지 않은 바 이들은 모두 우리 조선 민족을 위하여 진력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차제에 천연덕스럽게 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 동지들은 지금 중국 상하이·만주·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나도 동지를 규합하여 멀지 않아 만주로 갈 작정이므로 너도 우리 동지들에 가담하여 그 곳으로 가서 함께 노력하여 주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였다. 이에 마춘성도 그 계획에 찬성하여 함께 행동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후 1919년 8월 중순, 서울로 올라간 후 간도로 건너가 대한애국단(大韓愛國團)에 가입한 뒤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후 마춘성과 함께 경상북도 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함께 붙잡혔다. 1919년 11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수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후에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하여 1920년 3월 19일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영천면(永川面) 완산동(完山洞)에 소재한 영천역 앞에서 양한위(梁漢緯)를 만나 『독립신문』과 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대구 시내에 배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군자금 모집 활동으로 획득한 8,000여 원을 허병률(許秉律)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관공서를 폭파하고 대구 내 친일파 처단을 위해 폭탄 입수에 힘쓰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에 붙잡혀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독립신문 배포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이유로 1920년 9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다시 수감되었고, 형기를 채운 뒤 출옥하여 고향으로 내려왔다. 한편 1929년에 시작된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본토에서 농업공황이 발생하여 마기가 폭락하자 일제는 그 피해를 식민지 한국 농가에게 전가시켰다. 따라서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의 생활이 더욱 피폐해졌는데, 이때 한국인을 압박하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분노하여 의성군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10월 10일 의성면 도서동에 소재한 김규복(金圭福)의 양돈장에서 오병수 등과 만나 의성적색독서회(義城赤色讀書會)를 조직하고, 그 부서를 지도 겸 조직·청년·농민 세 부분으로 나눈 뒤 지도 겸 조직부 책임자를 맡아 활동하였다. 의성적색독서회는 1930년대 전반기 경상북도 의성군의 대표적인 비밀결사 민족운동 단체로, 동지를 규합하여 적색 스포츠단, 노동자 친목회, 농민 조합, 농민께, 테러를 위한 비밀 결사, 적색 독서회 등 합법·비합법 단체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이를 통해 의성읍을 중십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조직을 만들고, 실천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해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다시 붙잡혔고 재판에 송부되었다. 1934년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1935년 7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 풀려난 후 고향 의성군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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