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섭
吳堯燮1908. 2. 26 ~ 1982. 1.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옥구농민조합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3)
관련 사건
- · 옥구소작쟁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3) 1908년 2월 26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서수면(瑞穗面) 서수리(瑞穗里)에서 태어났다. 1927년 10월 2일 장태성(張台成)·박상호(朴相浩)·김영준(金寧俊) 등이 45% 이상의 소작료 지불 금지와 소작인의 소작료 포장 자율성 인정, 금비(金肥) 및 기타 비용의 지주 부담 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11월 20일 서수리의 일본 농장회사인 주식회사 이엽사(二葉社)는 75%의 과도한 소작료를 징수하고, 소작인의 입회 없이 관계자들만 간평(看坪)하는 등 가혹하게 농장을 경영하였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에서는 이엽사 농장 지배인 사이토 신이치(齋藤信一)을 방문하여 소작료 감액 문제에 관해 교섭하였다. 하지만 사이토 신이치가 농민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교섭을 거부했고, 이에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에서는 소작료 감면 이전까지 소작료를 불납(不納)할 것을 농장에 통지하였다. 또 조합원들에게 소작료를 지불하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옥구농민조합과 이엽사 농장의 대립이 대규모 쟁의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던 옥구군 서수면 경찰관주재소는 1927년 11월 24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위원장 장태성을 붙잡았다. 이후 장태성을 임피면(臨陂面) 경찰관주재소에서 구류한 후 군산경찰서(群山警察署)로 압송하려고 하였다. 장태성이 군산경찰서로 이송되기기 전 임피면 경찰관주재소에서 구류되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이진섭(李鎭燮)은 박상호를 비롯한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조합원들에게 위와 같은 사실을 전달하였다. 박상호는 같이 있던 동지 김행규(金杏奎)와 상의하여 주민들을 모은 뒤 압송 중인 장태성을 구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때 장태성을 구하기 위해 300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임피역(臨陂驛)으로 모였다. 1927년 11월 25일 임피역에 집결한 후 선두에 서서 주민들과 함께 임피면 경찰관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임피면 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한 후 동지 오승철(吳承喆)·이성순(李聖淳)·신문관(申文官)·한기석(韓箕錫) 등과 함께 임피면 경찰관주재소로 밀고 들어가 문을 부수고 “장태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들은 군산 감옥으로 따라갈 것”이라고 소리치며 장태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임피면 경찰관주재소 측이 이에 응하지 않자 장태성을 체포한 한국인 도순사(道巡査) 김종현(金宗鉉)을 끌어내어 구타하였다. 그 다음 실내에 구금 중이던 장태성의 포승줄을 칼로 절단하고 그를 추켜올려 헹가래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면서 임피면 경찰관 주재소를 떠났다. 같은 날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간부 박상호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수면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자, 오후 10시경에 신문관·이성순·정영운·이기렬(李基烈) 등과 함께 주민 200여 명을 이끌고 주재소로 몰려가 그를 구출하였다. 임피면과 서수면의 경찰관 주재소의 습격 소식을 접한 군산경찰서는 경찰관 수십 명을 서수면으로 파견하였다. 서수면에 도착한 일제 경찰들은 곧바로 소작쟁의 참가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11월 26일 밤까지 관계자들을 붙잡았다. 그 결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간부인 박상호·김행규 등을 비롯한 30여 명의 조합원과 함께 붙잡혔다. 1928년 2월 29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구금탈취, 소요죄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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