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옥
吳種玉1925. 4. 20 ~ 1944. 4.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민족의식 고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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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1925년 4월 20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동면(東面) 서무리(西茂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아버지는 오병섭(吳炳涉)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며, 3남 3녀 중 장남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은 오성지이며,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복전종옥(福田種玉)을 사용하였다. 1939년 3월 남원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지역의 대형운수업체인 공화자동차부(共和自動車部)에서 약 1년간 차장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1942년 9월 5일 광주 소재의 가네보방적 전남공장 직기과의 직공으로 취업하였다. 가네보방적은 일본의 미쓰이 자본계열인 가네가후치(鐘淵)가 한국에 진출 후 광주에 설립한 공장으로 1944년 종연방적(鐘淵紡績)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방적공장은 2,500여 명에 달하는 여공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방적공장 사측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어린 여공들을 고용하고, 이들에게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하였다. 또한 사측과 일제 자본을 비호하는 공권력은 서로 결합하여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이들은 노동력의 안정적인 확보와 노동자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공장 노동자들에게 최소 3년간의 고용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한 후 일을 시켜 법적인 족쇄를 채웠고, 노동자들의 외출을 허용하지 않는 등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평소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기에 공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보면서 일제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 공장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운영되는 등 민족차별 행위가 만연하였다. 한국인이 이용하는 식당을 별도로 마련하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것도 금지하는 등 한국인들을 일본인보다 열등한 하층민으로 취급하였다. 이처럼 공장에서 한국인들이 극심한 민족 차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며 크게 분노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제가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면서 형식적으로는 한국인 차별을 금지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근거로 한국인들을 일본군에 강제 징집시켜 전쟁에서 희생시키는 등 일제 식민지지배 정책의 이중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해 9월 20일, 직기과 보전과장인 야마모토 아사노보리(山本朝登)가 한국인 노동자들을 문책하면서 한국인 비하 발언을 일삼자 그것에 격분하여 일제에 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직기과 공동변소 벽에 흑연필로 “우리는 일본인을 죽이자”라고 써서 한국인들의 민족의식를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심한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1943년 2월 2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면서 1944년 4월 19일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와 7일만인 4월 2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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