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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준

吳昌俊

1890. 1. 2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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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창준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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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덕원(德源)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덕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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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6) 1890년 1월 29일 함경남도 덕원부(德源府) 상리(上里, 현 강원도 원산시 상중동)에서 태어났다. 자료의 한계로 자세한 성장 배경이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20년 9월 23일 함남 원산부(元山府)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같은 해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기회로, 김장석(金章錫)·김상익(金相翊) 등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추진한 것이다. 김장석은 김상익·조병철(趙秉喆)·김병륜(金秉綸)·이용구(李容九) 등과 향후 계획을 협의한 후 역할 분담을 하였다. 1920년 8월 21일 김장석은 동지들과 김상익의 집에 모여 미국 국회의원단에게 보낼 환영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의원단 환영,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한국인의 불만 폭로, 미국의원단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 등이었다. 그리고 거사일은 1920년 9월 23일로 정하였다. 김상익은 이 문건을 가지고 상경하여 각계 요로에 전달하고, 나머지 동지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김상익은 상경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9월 23일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동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산의 만세시위 준비는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1920년 9월 23일 저녁 원산의 남산교(南山橋) 아래를 거닐던 최종빈(崔鍾濱)·최종현(崔鍾炫)·이용구 등이 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처음 외치면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남산교 일대는 ‘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고 원산청년회관에서 이 소식을 들은 김장석·감상익은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여기에 원산보광학교(元山保光學校) 및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백여 명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조선식산은행 원산지점, 동양주식척식회사(東洋株式拓殖會社) 원산지점, 원산우체국, 파출소 등 일제 기관을 습격하였다. 또 평소 한국인을 무시하고 학대했던 일본인의 가옥과 상점에 돌을 던졌다. 이때 노동조합에 있던 동료들과 함께 북촌동(北村洞, 현 상중동) 시장 부근으로 달려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무렵 이용구 등이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라고 외쳤다. 이에 군중을 이끌고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을 이끌고 원산 시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경찰은 총칼로 탄압하여 현장에서 2명이 사망하고 주도 인물 약 50명이 붙잡혔다.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원산경찰서에서 58일간의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1920년 12월 23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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