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훈
金敎勳1896. 12. 2 ~ 1973. 5.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12월 2일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아포면(牙浦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한학자 김치주(金致株)와 권송림(權松林)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호는 취헌(翠軒)이다.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6대손이다. 대구의 계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7년경 아포의 송천교회(松川敎會)에서 세례를 받았고, 송천교회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3월 26일 경북 구미 장날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인근 지역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3·1운동을 더욱 확대하고자 노력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이 좁혀 오자 만주로 건너가 고산좌(孤山座)에 정착하여 군관학교에 자금 지원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음)8월경 고향에서 예수교학교 교사로 지내던 중 아포면 인동에 있는 음식점 백남태(白南台)의 집에서 김남수(金南洙, 1900~1971)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협의하였다. (음)9월 중순경 동지 최상원(崔相元)·김남수 등과 함께 아포면 제석동 소재 김호룡(金鎬龍)의 집에서 다시 모였다. 이때 엄용호(嚴龍浩)에게 입수한 독립운동 계열의 지하신문인 『혁신신보(革新新報)』와 『신한별보(新韓別報)』등을 보여주며, 동지들과 함께 기사를 발췌하고 일반 대중에게 등사·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인쇄를 담당하고 그 비용을 동지들에게서 갹출하기로 하였다. 이 일로 다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년 만에 귀국하였다. 1920년 송천교회의 영수 및 양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러한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이듬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2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2년 출옥 후 다시 송천교회로 돌아와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인근 지역 청년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김천에 대둔서림(貸屯書林), 선산에 죽림서림(竹林書林), 상주에 갑장서림(甲長書林) 등을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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