廉仁瑞
仁瑞1869. 2. 5 ~ 1910. 7.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안규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안규홍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1869년 2월 5일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봉덕면(鳳德面) 내동(內洞, 현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내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주(坡州)이며, 자(字)는 인서(仁瑞), 본명은 재보(在輔)이다. 그리고 별명으로 사람에게 흔히 염선달(廉先達)로 불리기도 하였다. 1908년 3월 전남 보성군에서 봉기한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다. 안규홍은 본래 1908년 2월 강원도에서 일본군의 진압을 피해 내려와 전라도 순천(順天) 부근에서 관동(關東) 출신 강용언(姜龍彦) 의병부대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강용언이 백성들에게 입히는 폐해가 심해지자 그를 참형하고 부대를 다시 재편하였다. 이때 강용언을 처단하는데 앞장서며 안규홍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부장(副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좌우포장(左右砲將), 좌우익장(左右翼將) 등 안규홍 의병부대의 주요 직임을 맡아 뛰어난 지략으로 여러 전투에서 일제 군경을 공격하는 활약을 하였다. 1908년 3월 보성군 조성면(鳥城面)에 복병을 매복시켜두고, 수색작전 중인 일본군을 파청(巴靑, 현 예당리 버들고개, 일명 鳩峴)에서 급습하여 중대장 나가토(永戶)·츠보이(坪井)는 즉사하였다. 1명은 총상을 입히고 지휘검을 비롯한 적의 병기 등 전리품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대원사(大原寺)로 물러나 주둔하던 중 뒤쫓아 온 일제 군경 몇 명을 쏘아 죽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문덕면 내가령 고개 길목에 매복하여 적병 4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동복(同福) 헌병대와 운월치(雲月峙) 고개에서 접전을 벌여 수십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의병부대도 큰 피해를 당했고, 4월 26일 서봉산(瑞鳳山)에 주둔하고 있을 때 토적(土敵) 조병기(趙秉琪)가 거느린 부대의 기습을 받아 남은 부대원과 함께 흩어졌다. 이후 7월에 석호산(石虎山)에서 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하였고, 와타나베(渡邊廷秋)의 기병대가 순천 헌병대와 합동하여 공격해 오자 상진산(上眞山)에서 헌병대 수십명을 사살하고 산을 타고 후퇴하였다. 8월 8일 밤에 원봉(元峰)에 주둔중인 와타나베의 기병대를 급습해 적군 2명을 죽인 다음, 막사를 불태우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9월에 적군과 외병티(外並峙)에서 싸워 수명을 사살하고, 11월에는 배를 타고 흥양(興陽)에 들어가 이곳에 주둔한 헌병대 청사를 습격하였다. 1909년 2월에 장흥(長興)에서 세무 감독관이 민간에 몰려다니면서 세금을 독촉하여 백성들이 원망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장흥으로 진격하자 본군에 있는 세무주사의 요청으로 도착한 헌병대와 평주리(平舟里)에서 교전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의병부대 몇 명을 동북쪽 읍내에 잠입시켜 적군 3명과 통역관 1명을 죽이고, 병기를 수습하였고, 일본 육군 7중대와 박곡(亳谷, 현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서 접전하여 중대장 히라이 나다이치(平井灘市) 등 수명을 사살하고 무기 여러 점을 빼앗았다. 한편, 직접적인 일제 군경과의 전투뿐만 아니라 의병의 활동을 밀고하거나 양민을 핍박하는 일진회원을 처단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1908년 5월 의병부대의 동향을 일본 관헌에게 밀고했던 일진회원 염영화(廉永化)를 보성군 봉덕면(鳳德面, 문덕면) 법화리(法化里) 집에서 총살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부하 40여 명과 함께 양민의 재물을 갈취했던 강모(姜某)를, 1909년 3월 6일과 9월 4일에도 양민에게서 재물을 갈취한 죄를 물어 일진회원 박봉조(朴鳳朝)와 이용서(李用西)를 처단하였다. 이처럼 안규홍의 부대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해 오던 중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호남의병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어 의병활동이 위축되어 갔다. 1909년 6월 초순 흥양(興陽, 현 고흥군) 헌병대와 마륜리(馬輪里, 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한 이후 많은 의병이 자수하거나 붙잡혔고, 귀순하기 시작하자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결국 그 해 9월 19일 전남 보성군 복내장(福內場)에서 일제 보병 제2연대에 붙잡혔다. 이후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살인죄로 교수형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2일 대구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0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으로서 형이 확정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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