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윤
吳泰允1880. 5. 2 ~ 1909. 1.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후기의병(김용구)
- · 일심계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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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5월 2일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영광면(靈光面, 현 영광읍) 우평리(牛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오승희(吳承熙)를 썼다. 1906년 봄 김용구와 함께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김용구(金容球)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 김유성(金有聲)으로도 불리었다. 1906년 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이자 명문 유생이었던 기삼연(奇參衍)과 만나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모색하였고, 동지를 모으기 위해 일심계를 만들어 의병을 일으킬 기반으로 삼으려 하였다. 기삼연은 이미 1896년에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했던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0년에는 의정대신에게 항일투쟁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밝힌 시를 지어 올렸으며, 1902년에는 의병을 일으키려다 붙잡혀서 서울의 평리원으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김용구는 노사학파 계열로서 기우만의 문인이었다. 기삼연은 의병과 관련하여 일제의 주시를 받는 인물이었으므로, 김용구로 하여금 일심계를 이끌게 한 것이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통감부에 의한 내정간섭이 대폭 강화되었다. 여기에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당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가세하였다. 전투력을 겸비한 해산 군인들이 의병진에 가세하면서 의병운동은 일본과의 전면전쟁의 성격을 띠는 대일 항전으로 확대되었다. 후기의병기 호남의병은 전국의병을 대표했다고 할 정도로 격렬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탄압도 가장 강력했으며 희생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호남의병은 민중계층이 대거 참여한 특징이 있으며 일제의 축출,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의 처단, 일본상품의 배격 등과 같은 민족적인 이념은 물론이고, 탐학한 관리의 축출과 같은 반봉건적인 이념을 동시에 내세우고 있었다. 기삼연과 김용구는 1907년 9월에 영광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 2일 연곡사(蓮谷寺, 현 구례군 토지면)·화개(花開, 현 하동군 화개면)·오동(梧洞, 현 영광군 염산면), 남문(南門) 등지에서 김창복(金昌卜)·박용근(朴溶根)·봉제화(奉齊化)가 각각 좌익(左翼)·호군(犒軍)·참모(參謀)에 임명될 때, 종사(從事)에 임명되었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영광 염치(廉峙, 현 장성군 삼계면)로 이동하여 송치(松峙, 현 광양군 광양읍)·영광·장성·고창(高敞)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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