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춘백
王春伯1881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후기의병(민긍호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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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1년 당시 30세로,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민긍호는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가 강제 해산되자 300여 명의 진위대 병사들을 이끌고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많은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편성되어 제천(堤川)·죽산(竹山, 현 안성시 동부 일대)·장호원(長湖院, 현 이천시 장호원읍)·홍천(洪川)·여주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활약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1907년 9월에는 홍천을 습격하고 낭천 군아를 기습 공격하여 무기고에서 총기, 탄약 등을 접수하였다. 1907년 12월에 양주(楊州)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민긍호는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으로 의병들을 이끌고 합세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3도창의군은 허위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는 서울 탈환작전을 결행했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으로 패산하고 말았으며, 그 후 의병들은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때 1907년 6월 민긍호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해 6월부터 8월까지 동료 의병대원 300여 명과 함께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현 충주시) 일대와 강원도 횡성군 일대와 원주군 일대에서 군수품 모집 운동을 펼쳤다. 민긍호는 1908년 2월 29일 태장벌(台庄垡, 현 원주시 태장동) 전투에서 부상하여 부대를 치악산으로 퇴각시켰는데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결국 지금의 횡성군 강림촌(講林村) 태종대(太宗臺, 현 강림면 강림리) 부근에서 사망하였다. 민긍호가 일본 군대에 의해 사살되어 의병부대가 북방으로 퇴각했음에도 경술국치 이후까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1911년 1월에는 금지철(琴地哲)·이용석(李龍錫)과 함께 강원도 횡성군 고모곡면(古毛谷面) 이십곡리(二十谷里, 현 횡성군 서원면 석화리 스무나리마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붙잡혀서 1911년 2월 20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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