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建奭

建奭

1852. 11. 25 ~ 1906. 5. 10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建奭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충북 영동(永同)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환어소청
  • · 복수소청
  • · 건의소청
  • · 도약소
  • · 광의소청
  • · 대한십삼도유약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 · 을사늑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52년 11월 25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황간면(黃澗面)에서 이상영(李象榮)과 함양 오씨(咸陽 吳氏)의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경(漢卿)·(漢京), 호는 성석(醒石), 이명은 이한경(李漢卿)·이원필(李源弼)이다. 어려서부터 지조가 굳고 기상과 절개가 강하였다. 젊어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상경하여 반개화 항일 상소 운동을 벌였다. 관직은 내부(內部) 주사(主事)를 지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후 고종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일본과 친일 개화파의 만행을 규탄하고 원수를 갚을 것을 주청하였다. 1896년 김운락(金雲洛)·채광묵(蔡光黙) 등 수백 명의 유생들과 함께 환어소청(還御疏廳)을 만들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2월 고종이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겨간 후, 국가가 솔선하여 을미사변의 원수를 갚고 종사의 위기를 타개해야 하며 개화 인사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3월에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유생들이 을미사변을 복수하고자 서울 용동(龍洞)에 설치한 복수소청(復讐疏廳)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김운락·김현준(金顯峻)·조학원(趙學元) 등과 함께 고종에게 6차례나 상소를 올려 을미사변에 관련된 모든 개화 인사들과 전현직 관료들을 잡아다 처형하고, 개화 정책으로 변개한 모든 제도를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98년 2~3월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다툼이 첨예하게 전개되자 많은 유생들과 건의소청(建議疏廳)을 설치하여 상소 운동을 벌였다. 이때 “국가의 재부와 군권을 외국에 맡겨서는 안 되고, 절영도(絶影島) 문제는 국사에 관계되므로 충훈부(忠勳府)에 모여 난상토의로 사안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외국 어선의 어획량에 상한선을 두고, 홍삼의 투증(偸蒸)을 금지시키고, 화폐에는 반드시 조선의 연호를 사용하게 하고, 외국인은 외부의 증명서가 없으면 내지를 유람하지 못하게 하며, 흉년에 미곡을 외국으로 반출하지 못하도록” 건의하였다. 1898년 7~10월 건의소청에 가담한 유생들이 다시 모여 도약소(都約所)를 설치하고 고종에게 누차 상소를 올렸다. 이때 이문화(李文和)·김운락 등과 함께 반개화·반침략 상소 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다. 이들은 고종 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安駉壽)를 붙잡아다 처형하라고 주장하며 친정부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아가 자주독립을 옹호하고 외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며 열강이 차지한 각종 이권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2년 4월 한성근(韓聖根), 조희일(趙熙一) 등이 엄비를 황후로 승격시키려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자, 5월에 이문화·김운락·정회규(鄭會圭) 등과 함께 광의소청(廣議疏廳)을 설치하고 성균관과 서울 인근에 통문을 보냈다. 여기서 엄비를 황후로 승격시키려는 상소 운동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기강을 바로잡고 하루속히 황후를 간택하여 명위(名位)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일본이 경부 철도를 부설하면서 시흥과 수원 사이에 있는 지지대(遲遲臺) 일대를 정차장으로 만들어 주민들의 거주소로 만들려 하자 이를 강력한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갑오개혁 이래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자주 화란(禍亂)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금광·탄광·어장·삼림·토지·주택 등 국민 생활에 필요한 자원들을 모두 차지했는데 이제 다시 지지대 일대를 철도 부설을 위해 없애 버리려 한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미 일본은 7월에 태프트-가쓰라 비밀 협약, 8월에 제2차 영일동맹, 9월에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통해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특수 권익을 인정받은 터였다. 11월 9일 입경한 이토가 한국 보호국화 작업을 가속화해 나가자 그를 포함하여 많은 유생들은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라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 상소 운동에 나섰다. 김동필(金東弼)을 필두로 23인의 대한십삼도유약소 유생들은 전국 각지 향교에 통문을 보내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였다. 이들은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이 자행한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사실들을 조목별로 나열했다. 또한 이들은 각국 공사관에도 일제의 한국 침략 정책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공개장을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보호 조약이 조만간 체결될 것이라는 소식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고,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일진회(一進會)가 일본의 지도에 따르고 일본의 보호에 의거하여 국가 독립을 유지하자는 망국적인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십삼도유약소 유생들은 전 승지 이석종(李奭鍾)을 상소 책임자로 삼고 그가 지은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이 상소는 “일본이 인의(隣誼)를 저버리고 만국 공법을 위반하고 한국의 산림·천택(川澤)·어염(魚鹽)·금광·탄광·미곡 등을 빼앗는 침략 정책을 자행함을 비판하고, 또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고 일본의 힘에 의지해 국권을 보호받자는 일진회의 역적 행위를 엄하게 징치하여 매국 세력의 뿌리를 뽑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일진회의 매국 활동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상소 운동에 대해 고종은 경무관을 파견하여 “너희들이 화를 당할 것이니 상소 책임자 1인만 남겨 두고 모두 귀가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듣지 않고 보호 조약 논의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11월 17일 새벽 상소 운동의 주도자들과 함께 일본군에 붙잡혔다. 일본군 사령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고 옥고를 겪다가 1906년 5월 10일 피를 토하고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유서에는 “오호라. 죽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마는 제대로 죽는 일이 어려운 법이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국적(國賊)들을 베지 못하고 국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를 토하고 죽음에 임하여 몇 글자로 영결하노니 나를 위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고 장례를 호사스럽게 하지 말라. 오직 내 뜻을 계승하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하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대한십삼도유약소의 유림들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일제 헌병이 여러 번 위협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공 등이 다시 이런 반대 항쟁을 하지 않는다면 곧 석방하겠다”고 하였으나 전혀 듣지 않았다. 일본군이 그의 유해를 문밖에 유기하자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실을 들어 “일본이 우방의 교의에 어긋나고 세계의 공의를 속이는 짓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영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