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의선
吳義善1889. 12. 8 ~ 1931. 5.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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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80) 1889년 12월 8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원삼면(遠三面) 죽릉리(竹陵里)에서 오인묵(吳寅默)과 구(具)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이명으로는 오희선(吳羲善)·우단우(禹丹宇)·오기선(吳基善) 등을 사용하였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다녔다. 재학 중인 1919년 2월 8일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 등 유학생들과 도쿄(東京) YMCA 강당에서 열린 2·8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기도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어 같은 해 4월 30일 개회된 임시의정원 제4차 회의에서 청원법률심사위원과 세칙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1일에는 대한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7월 7일부터 열린 5차 회의에서는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었고,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국제연맹청원안 제정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1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박용만(朴容萬)·김복(金復, 본명 金奎興) 등과 독립군 기지 개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설립하였다. 또 대구 출신 최윤동(崔胤東)을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게 하였으나, 활동 중 경찰에 붙잡히는 바람에 흥화실업은행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후 1920년대 중반 무렵 국내로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하였다. 1925년 4월 17일 화요회가 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 등 사회주의 단체들과 통합해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창당하면서, 경성부 간부, 중앙집행위원회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지린성(吉林省) 주허시엔(珠河縣)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결성되자,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다 그 해 가을 제2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또 체포된 공산당 당원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 모플(MOTTP, 국제혁명자후원회)이 설치되자, 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3월 고향인 용인에 들렀다가 3월 14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어 그 해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복막염과 폐결핵에 걸려 같은 해 5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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