廉元淑
元淑1878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심남일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심남일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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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7)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지양면(知良面, 현 나주시 산포면) 송림리(松林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09년 당시 32세로,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당시 거주지는 전남 장흥군(長興郡) 군내면(郡內面)이었다. 자료의 한계로 그 외에 직업, 가족 내력, 성장 과정 등 인적 사항은 확인할 수 없다. 1904년 일제는 본격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전쟁을 전개하면서 강제적으로 한국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즉,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군사·외교·재정권 등 일련의 국권을 빼앗았다. 이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1907년에 이르러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더불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로 한국의 내정까지 침범하여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국권침탈 행위에 분노하는 애국지사들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 봉기하여 일본군과 맞서는 데에 나섰다. 1909년에 이르러 의병 활동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되어 고조화되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향반 출신인 심남일 의병장은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여 의병장 김태원(金泰元)의 아우 김율(金律)의 부장이 되어 함평·장성(長城)·영광(靈光)·남원(南原)·보성(寶城)·장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으며, 김율이 전사한 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들을 인솔하여 일본군과 대항하였다. 이때 심남일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부대의 서기 겸 모사로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심남일 의병부대는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재정비하였으며, 1908년 3월 남평군(南平郡, 현 나주시 남평읍)으로 행군하면서 강진군(康津郡) 강진면(康津面) 오치동(吾治洞, 현 강진읍 서산리 옥치마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여 수십 명 일본군을 살상하였고 무기 등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부터 10월까지는 장흥군·남평군·능주군(綾州郡, 현 화순군 능주면)·영암군(靈岩郡)·나주 등지에서 일본군 습격, 군수품 모집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4월 보성군, 장흥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에 붙잡혔다. 1909년 10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동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던 중인 1910년 8월, 칙령 제325호 ‘대사령(大赦令)’에 의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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