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칠
柳敬七188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7) 경기도 마전군(麻田郡) 하신면(河新面) 구미리(九尾里, 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출신이다. 일제 측 판결문에 따르면 1911년 당시 23세로, 1889년생으로 추정된다. 직업은 농업이었다. 홍원유(洪元裕)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국권침탈 행위에 분노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홍원유 의병장은 군인으로 경기도 적성군(積城郡) 출신이었다. 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1908년부터 윤인순(尹仁淳)의병부대와 연기우(延基羽)의병부대의 참모장으로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윤인순 의병장이 사망한 이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909년 10월부터 1911년 1월 사이에 경기도 적성군(현 파주·연천·양주 일대)·파주군(坡州郡)·포천군(抱川郡)·양주군(楊州郡) 등지에서 일본군 습격, 친일파 차단, 군자금 모집 등 다양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 의병에 투신하여 1909년부터 홍원유(洪元裕) 의병장의 부하가 되어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음)1월 20일 같은 의병부대에 소속된 최중식(崔重植)을 비롯한 의병 여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여 경기도 양주군 시북면(柴北面) 양지리(楊地里, 현 의정부시 낙양동)에서 돈 2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10년 (음)5월 30일에는 같은 의병부대에 속한 다른 의병 2명과 함께 군도와 총기를 휴대하여 연천군(漣川郡) 상남면(上南面)에서 돈 19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처럼 경기도 각 군내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1911년 6월 14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염정⋮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