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柳季明

季明

1890. 5. 22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柳季明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7) 1890년 5월 2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마령동(馬嶺洞)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유치득(柳致得)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동 지역의 만세운동은 일본의 도쿄(東京) 유학하던 중 귀국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한 강대극(姜大亟)의 활동과 1919년 3월 1일 이후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이 지역에 전파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학생 김재명(金在明)의 활동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선도적인 활동은 곧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는데, 임동면에서는 유연성(柳淵成)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유연성은 전기의병 시기에 안동의병(安東義兵)에서 활동한 유지호(柳止鎬)의 아들로, 당시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편항시장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유연성은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임동면의 만세운동을 결의하여 함께 행동할 동지들의 규합에 노력하였다. 이에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성(朴晋成)·유곡란(柳谷蘭) 등이 유연성과 뜻을 함께하여 동지로 결합하였다. 3월 15일 편항시장 동편의 공동타작장(共同籾落場)에서 유연성은 유동수·이강욱 등 7명의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조직하기 위한 비밀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유연성은 “지금 조선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관청을 파괴하는 것은 독립의 시위운동이므로, 이번에 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파괴하여, 우리의 힘을 과시하면 반드시 우리 조선은 독립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역설하여 주체적 역량을 발휘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지들과 협의하여 편항시장의 장날인 3월 21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고, 당일 경찰이 만세시위를 제지하는 일이 있으면 편항주재소까지도 파괴하여 이 운동을 수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주민 참여의 방법 등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날 회의의 결정에 따라 유연성은 대곡동(大谷洞)·위동(渭洞), 유동수는 마령동(馬嶺洞), 이강욱·홍명성은 갈전동(葛田洞), 유곡란(柳谷蘭)·박진성(朴晋成)·박재식(朴載植)은 편항시장 부근 지역, 유교희는 박곡동(朴谷洞)·수곡동(水谷洞)의 주민 참여를 책임지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유동수로부터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상황과 그 의의를 전해 듣고, 3월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예정되어 있으니 동참하라는 호소에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한 마을 주민들과 함께 편항시장으로 갔다. 오후 2시경, 유연성을 비롯한 주도 인물들이 시장의 한복판으로 나왔다. 먼저 유연성이 시장에 운집한 주민들을 향해 우리가 만세를 불러야 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호소한 후, 유동수 등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즉각 2명의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치안 방해 행위로 규정하고, 만세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배태근(裵太根)의 따귀를 때리며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일제 경찰들은 유연성과 배태근을 만세시위 주도자로 지목하여 이들을 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에 유동수·유교희·박진성 등이 만세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이미 만세시위를 준비할 때 결의한대로 즉각 주재소를 습격할 것을 호소하였다. 일제 경찰들의 강압적인 행동에 크게 분노하고 있던 중, 유동수 등의 호소를 듣고 곧바로 이들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 습격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시위대의 진입을 막으려고 공포탄을 쏘던 일제 경찰 우치다 쥰스케(內田甚助)를 다른 주민들과 함께 구타하여 무력화시키고, 몽둥이와 돌멩이 등으로 주재소 및 순사들의 숙사 2동 등의 건물을 기둥과 지붕만 남기고는 전부 파괴하였다. 그리고 주재소에 비치되어 있던 각종 장부 및 무라다총(村田銃) 2정을 비롯한 비품의 대부분을 우물 속에 던져 모두 폐기시켰다. 이렇게 주재소를 습격하여 그 기능을 정지시킨 후,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평소 식민 행정의 말단 기구로 원성이 높았던 면사무소를 다음 목표로 설정하고 습격에 나섰다. 유동수 등과 함께 면사무소의 입구 문을 파괴하고 구내로 들어가 유리창, 벽판(壁板) 등을 파괴하고 비품과 책상, 걸상 등 가구를 모두 파괴한 후, 장부, 편책(編冊) 등 문서류도 전부 파기해 버렸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의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 및 면사무소 습격으로 인한 통쾌함과 해방감 속에서 다음날인 3월 22일 새벽 3시경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이 직후 대규모 만세시위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안동에서 임동면으로 파견나온 일제 경찰과 수비대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건조물 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곧바로 항소하였다.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음에도, 동일하게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8월 19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