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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흥

吳雲興

1898. 3. 3 ~ 1966.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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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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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봉산(鳳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봉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청년단연합회
  • · 광복단(안동)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8년 3월 3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에서 태어났고, 봉산군 사인면(舍人面) 산산리(蒜山里)에서 거주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단원으로 활약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2년 황주군(黃州郡) 양성학교(養性學校)를 마치고, 1916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후 1919년 5월 평양 독립운동 청년단 황주대표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육군무관학교를 수료하였고 하나 공적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20년 황해도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려는 사명을 갖고 귀국하였으나 그 해 4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중국 콴뎬현(寬甸縣)에서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 통일적 군사기관으로 수립된 광복군(光復軍, 후일 광복군총영) 소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군자금 모집과 일제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광복군 동지 김명권(金明權)·서봉근(徐奉根) 등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19년 11월 국내 각 항일청년단체의 연합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이다.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의 성격을 가지며 평안북도 벽동(碧潼)·창성(昌城)·삭주(朔州)·의주(義州) 등지에서 친일파 처단, 일제기관 파괴 등을 실행하는 이 단체에 몸담아 활동하였다. 또 랴오닝성(遼寧省) 안투현(安圖縣)에서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등이 독립군 150명을 모아 만주항일무장투쟁 단체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자 그 단원이 되었다. 1921년 1월, 대한청년단연합회가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김명권을 덕천(德川)지방에, 서봉근을 평양에 보낼 때 황해도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권총을 소지한 채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같은 달 27일 밤 덕천군(德川郡) 태극면(太極面) 영창리(永昌里, 현 영원군 영창리) 대교를 지날 때 성명과 주소를 묻고 몸을 수색하는 덕천경찰서 순사 오가와라 타츠노스케(小河原辰之助)와 교전하였다. 이어서 오가와라 순사를 총살하고 은신하였다. 1921년 6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평안남도 영원(寧遠)·덕천·맹산(孟山) 지구 지하조직으로 일제기관 파괴와 친일파 처단, 군자금 모집 등을 전개하던 호굴독립단(虎窟獨立團)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단원들이 대거 붙잡혔다. 이때 오가와라 총살 사건의 배후 또한 드러났다. 이에 1921년 7월, 신계군(新溪郡)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서흥(瑞興)경찰서 경찰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9년 4월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 대동정미소(大同精米所)를 경영하였다. 광복 이후 심월동지회 청년부장과 김구(金九)의 비서로도 활약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차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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