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金慶喜1888 ~ 1919. 9.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송죽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애국부인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3.1운동
- · 애국부인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88년경 평안남도 평양(平壤)의 개신교 집안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김경희(金敬喜, 金敬熙)라는 이명이 있다. 1908년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경 전남 목포(木浦)의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에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3년에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시덕(黃愛施德), 같은 학교 졸업생 안정석(安貞錫) 등과 함께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 일명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송죽회는 숭의여학교 출신과 교사·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 비밀결사로서,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과 지원, 망명 지사들의 가족 돕기, 회원들의 실력 양성 등을 목표로 하였다. 이 단체는 약 20명의 창립회원을 송(松) 형제라 하여 핵심 회원으로 삼고, 그 밑에 죽(竹) 형제라는 하부 단위를 둔 이원적 조직이었다. 회원은 월 회비 30전을 납부하도록 하였고, 매주 1회 기숙사에서 기도회 형식의 비밀 회의를 하고 토론회 등을 통하여 항일 의식을 배양하였다. 이후 숭의여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황애시덕은 서울을 중심으로, 안정석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 확대에 주력하였다. 회장으로서 조직의 비밀 유지를 위해 신입 회원의 가입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점조직으로 운영하여, 끝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에 발각되지 않고 유지하였다. 이후 송죽회 회원들은 전국의 여학교에서 교편은 잡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 사상을 전파하였다. 1916년 지리 수업 시간에 하얼빈 지명이 나오자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를 세우자는 강의를 한 것이 탄로나 배일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풀려났다. 이때 폐질환을 얻어 평생을 고생하였다. 일제의 강요로 학교에서 면직당한 후 평양 서문밖 교회 권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하순경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가 독립자금 모집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자 그녀에게 여러 동지를 소개해주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송죽회를 이끌고 기독교회 여성과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주동자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평양의 동지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9년 7월 평양 숭실학교 학생 김정목(金鼎穆)과 함께 비밀리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평양에서 비밀결사 부인회(婦人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인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던 중 폐질환이 재발하여 1919년 9월 19일 사망하였다. 유언으로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훗날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 주십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 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독립신문』에서는 “애국심의 화신”이라 표현하며 죽음을 애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