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한
尹炳漢1873. 6. 20 ~ 1932. 10.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만승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3년 6월 20일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만승면(萬升面, 현 廣惠院面) 광혜원리(廣惠院里)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육군 참위(參尉)로 근무하였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고향인 진천으로 귀향하여 농민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2일에서 3일까지 전개된 만승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진천에서 농민 계몽 활동 중,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만승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우선 진천읍(鎭川邑)의 이상직(李相稷)과 연락하여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그 후 동지를 규합하여 4월 1일 이상직 및 정관옥(鄭寬玉)·오은영(吳殷泳) 등과 상의하여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다음날인 2일로 결정하였다. 주민들의 참여에 대해서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회죽리(會竹里) 일대의 면유림(面有林)에 식목을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2일 오후 면유림 작업에 많은 주민들이 모였다. 주민들에게 술을 돌리고 앞에 나서서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호소한 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 연설을 듣고 공감한 정운화(鄭雲和)·남계홍(南啓弘)·백선옥(白先玉)·이영호(李榮鎬)·신달용(申達用) 등 200여 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이상직 등과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신축 중인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여 공사장을 파괴하였다. 다시 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서기 등에게 “너희도 같은 조선인이니, 시위대에 가담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였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불응하자, 시위대를 지휘하여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곡괭이와 몽둥이 등으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장지문을 부수는 등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다음날에도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4월 3일은 광혜원의 장날이었다.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과 함께 광혜원장터로 나가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낮 12시를 전후해서는 음성(陰城)·죽산(竹山) 방면에서도 주민들이 동참하여 만세시위대는 2,000여 명의 규모가 되었다. 전날에 이어 재차 돌을 던져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그 후 면사무소에서 탈취한 등사판과 백지, 철필 등을 가지고 면사무소의 소사 박수문(朴秀文)에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자”는 내용의 경고문 20여 장을 인쇄하게 하여 이날 밤 광혜원장터 일대에 부착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응하여 광혜원의 헌병분견소장 이리에(入江)는 진천읍으로 연락하여 지원 병력을 요청하였다. 광혜원에 도착한 일제 헌병들은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곧바로 발포하여 유치선(柳致先) 등 10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4월 4일 정관옥·오은영 등과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혔다. 일제 헌병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실이 인정되어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마찬가지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