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光民
光民1895. 5. 9 ~ 1945. 10.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 · 의성단
- · 한족노동당
- · 재만농민동맹
- · 정의부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송강청년연맹
- · 한족공의회
- · 동중국한인청년연맹
- ·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위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1895년 5월 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동후면(東後面) 도곡동(道谷洞)에서 아버지 이봉희(李鳳羲)와 어머니 인동(仁同) 장씨(張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이명은 이문형(李文衡)·이광민(李光珉·李光敏)·이영형(李永衡)·이영(李暎·李英) 등이다. 큰아버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둘째 큰아버지 이상동(李相東), 아버지 이봉희, 사촌형 이준형(李濬衡)·이형국(李衡國)·이운형(李運衡), 동생 이광국(李光國), 그리고 5촌 조카 이병화(李炳華)까지 가족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가문이다. 1907년 설립된 협동학교(協同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1년 2월 3일 큰아버지 이상룡의 인솔하에 온가족이 안동을 떠나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삼원포에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실천에 옮긴 이회영(李會英) 일가와 이동녕(李東寧) 등도 와 있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퉁화현(通化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를 탄생시켰고, 한족회는 1919년 11월 17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獨立軍團)이 되었다. 이상룡이 서로군정서 독판(督辦)에 선임되자, 이상룡을 보필하며 활동하였다. 1923년 의성단(義成團)에 가입하여 창춘(長春)·지린(吉林)·하얼빈(哈爾濱) 등을 무대로 단원들과 결사대를 구성해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11월 4일 판스현(磐石縣) 부태하(富太河)에서 같은 고향 출신인 김응섭(金應燮)과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을 조직하여 선전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의 명칭을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으로 바꾸었으며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1924년 중반 남만주 독립운동계의 통합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진산(李震山)과 서로군정서 대표가 되어 통합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서로군정서의 직책은 영업부장이었다.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자 민사부 서무과 주임위원에 임명되었다. 1925년 5월 임시정부 법무총장 오영선(吳英善)과 내무총장 이유필(李裕弼)이 서간도로 와 이상룡에게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 취임을 요청하였다. 그 해 8월 하순 이상룡을 보필하여 상하이로 이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 24일 이상룡이 국무령에 취임하자 국무원 비서장 임시대리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인 12월 6일 하와이의 현순(玄楯)에게 편지를 보내 대통령 직위를 박탈당한 이승만이 교민들로부터 인구세나 단보금(担保金)을 받는 것은 한심한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미주 동포의 사정을 알기 위해 『국민보』·『태평양잡지』 등을 보내 주도록 요청하였다. 1926년 1월 10일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메리다지방에서 인구세를 비롯한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오자, 재무부 임시회계 사무원 자격으로 감사장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이상룡이 국무령을 사임하자 만주로 돌아와 정의부 재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 해 10월 24일부터 17일간 개최된 정의부 중앙의회 회의에서 중앙행정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법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2월 7일 정의부·한족노동당·남만청년총동맹 등 남만주에 근거지를 둔 세 단체가 조선혁명가후원회(朝鮮革命家後援會)를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독립운동 동지와 그 가족을 돕는 데 앞장섰다. 1927년 초부터 만주 독립운동 진영에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나, 그 해 4월 15일부터 지린성 신안둔(新安屯)에서 개최된 회의에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 등과 정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52명의 대표들이 4일간 회의를 열고 강령과 서약문을 합의하고, 세부 지침을 마련할 기구로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8년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5일간 화뎬현(樺甸縣) 화흥학교(華興學校)에서 개최된 민족유일당조직회(民族唯一黨組織會) 1차 회의에서는 진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27일 만주 동북지역을 근거지로 조직된 동중국한인청년연맹(東中國韓人靑年聯盟)의 이란현(依蘭縣) 책임자가 되었고, 1929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대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에 참여하였다. 1930년 3월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全滿韓人反帝國主義大同盟) 창립주비회의 상무위원이 되어 이주 한인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1932년 5월 12일 이상룡이 지린성 수란현(舒蘭縣)에서 사망하여 가족들은 귀국하였으나, 만주에 남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중반 쥐위앤창(聚源昶)으로 옮겨 독립군 요원을 모집하고 위기에 빠진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