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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起璨

起璨

1853. 10. 12 ~ 1908.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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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起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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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靑松)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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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김산 의병
  • · 이기찬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3) 1853년 10월 12일 경상북도 청송(靑松)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능(敬能), 호는 지산(止山) 또는 금초(錦樵)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활동 당시 경북 상주군(尙州郡) 천탁산(天卓山) 아래 금천(錦川, 현 상주시 화서면(化西面) 금산리(錦山里))에서 거주하였으며, 스스로 금초산인(錦樵山人)이라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주·선산지역에서 조동석(趙東奭)·허위(許蔿)·강무형(姜懋馨)·양제안(梁濟安)·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몇 차례 의병부대를 일으킬 것에 대한 논의를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김산(金山) 유생 여중룡(呂中龍)과 여영소(呂永韶) 등도 금릉향교(金陵鄕校) 곧 현재의 김산향교(金山鄕校)에 모여 통문을 띄우고 향회를 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 통문을 보고 1896년 3월 23일 상주·선산지역 유생들인 허성산(許盛山)·강석포(姜石圃)·양벽도(梁碧燾)·김봉초(金鳳超) 등과 김산 지역으로 이동하여 함께 부대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김산 지역 유생들은 이를 선뜻 결정하지 못하자 상주·선산 지역 유생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조직을 갖추고, 김산군(金山郡)의 군기고(軍器庫)를 기습하여 군기를 확보하였다. 3월 24일 김산향교에서 향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상주·선산 쪽에서는 허위가 같이 참여하였고, 김산 쪽에서는 여중룡·여영소·이상설 등이 참여하였다. 그 결과 3월 24일 그날 김산(金山) 의병부대이 조직되었다. 대장에 추대되어 군례(軍禮)를 행하고 ‘김산창의대장(金山倡義大將)’이라 쓴 큰 대장기를 세우고 김기력(金基櫟)을 중군(中軍), 조동석·여중룡을 찬획(贊劃), 강무형을 군관, 허위·여영소를 참모(參謀) 등으로 하는 진용을 꾸렸다. 이어서 격문을 각지에 보내 군사를 모집하였다. 대구부 진격을 목표로 3월 25일 김산향교를 출발하여 김천에 주둔하였다. 3월 26일 지례읍(知禮邑)에 이르러 현감의 협조를 얻고 다음날 구성(龜城)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3월 29일 대구에서 관군 수백 명이 김천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병사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의병이 흩어지자 상주 금천으로 돌아왔다. 그 뒤 1896년 4월 7일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여영소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 조동석을 도총(都摠), 강무형을 찬획(贊劃), 허위를 참모장(參謀長), 이시좌(李時佐)·여영소를 서기(書記), 양제안을 중군(中軍), 윤홍채(尹鴻采)를 선봉장 겸 조련장으로 하는 진용을 꾸리고 군량과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 결과 포군 100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았다. 직지사에서 며칠을 머문 뒤 황간(黃澗)을 거쳐 황계(黃溪)로 옮기면서 세력 확장에 노력하였다. 이후 마산점(馬山店)·장자동(莊子洞)·임곡(林谷)·지례 등을 거쳐 4월 17일 지례군 홍심동(紅心洞, 현 부항면(釜項面) 대야리(大也里))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이때 이주필(李周弼)을 부의장, 이성백을 우익장, 류인목(柳寅睦)을 도집례, 조시영(曺始永)을 군량도감에 임명하고 진용을 보강하였다. 홍심동은 판서 이용직(李容直)의 별장이 있던 곳인데, 서찰을 보내 이곳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벼 80여 석을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홍심동에 머물던 중 4월 20일 대구 관군 70여 명이 구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월 21일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나가 구성면(龜城面) 도곡촌(道谷村)에서 관군과 마주쳤다. ‘관군도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글을 보내 접전을 피하려 하였지만, 관군이 쏜 몇 차례의 포격에 의병은 무너지고 말았다. 지도부를 이끌고 홍심동으로 되돌아왔으나 흩어졌던 병사들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4월 22일 의병부대를 전라북도 무주(茂州)로 옮기기로 하고, 충청북도 영동(永同)을 거쳐 4월 30일 황간에 도착한 뒤 참모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할 것과 호서지방의 류인석(柳麟錫) 의병부대와 합세할 것을 결의하였다. 황간에 머물던 중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의병을 이끌고 접전을 계속하며 상주를 거쳐 충북 보은(報恩)과 괴산(槐山)을 지나 경북 문경(聞慶)지역으로 옮겼다가 5월 12일 상주 화북(化北)지역으로 옮겼다. 5월 13일 류도섭(柳道燮)·조동석과 함께 상주 화서면(化西面)에 있는 청계사(淸溪寺)에서 대장직을 사임하고자 하였다. 대원암(大院庵)에서 하루 더 묵고 5월 16일 대장직에서 물러났다. 대장직에서 물러난 뒤 금천(錦川) 본집으로 돌아와 서당을 열어 제자를 양성하다가 1908년 1월 13일 사망하였다. 장남 이강하는 의병활동 이후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고 이강은·이강한 등 다른 아들들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문집으로 『지산유고(遲山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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