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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尹東柱

1917. 12. 30 ~ 1945.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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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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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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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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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0)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間島省, 현 지린성)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윤영석(尹永錫)과 김용(金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필명은 윤동주(尹童舟), 창씨명은 평소동주(平沼東柱)이다. 부친 윤영석은 1909년부터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이후 베이징과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학우들과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발간하였다. 1931년에 졸업 후,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35년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로 편입하였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학생회에서 간행하던 교지 『숭실활천』에 「공상」을 게재하였으며, 그밖에도 「남쪽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썼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다시 룽징(龍井) 광명학원(光明學園) 중학부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옌지(延吉)에서 간행되던 잡지 『카톨릭소년』에 「병아리」, 「빗자루」 등의 시를 게재하였고, 발표하지 않은 수십 편의 시를 섰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슬픈 족속」, 「비오는 밤」 등의 시를 썼고, 1939년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유언」, 「아우의 인상화」 등을 게재하였다. 1941년에는 「서시」, 「또다른 고향」, 「십자가」, 「별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등을 발표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하던 잡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게재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1942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도시샤대학 재학 중인 1942년 11월 하순 거주지인 교토시(京都市) 사이쿄구(左京區) 다나카나가하라초(田中高原町) 다케다(武田) 아파트에서 한인 학생 장성언(張聖彦)과 조선총독부의 조선어학회 검거에 대해 논쟁한 뒤, “문화의 멸망은 민족의 궤멸에 다름아니라는 까닭을 역설하고, 조선문화의 앙양에 노력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다음 달인 12월 중순에는 교토시 사이쿄구 긴카쿠지(銀閣寺) 부근 가로에서 “개인주의사상을 배격하고 조선 민족은 끝까지 개인적 이해를 떠나 민족 전체의 번영을 초래할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1943년 2월 초순 거주지 다케다 아파트에서 한인 학생 송원휘충(松原輝忠)과 국내 학교에서 한국어 과목이 폐지된 것에 대해 논쟁하고 한국어 연구를 권장한 뒤 ‘내선일체’정책을 비방하고, “조선 문화의 유지, 조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립 달성이 필수적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같은 달 중순에는 국내의 교육기관, 학교 졸업생의 취직 상황 등의 문제를 다루며 조선과 일본 간 차별과 압박이 있다고 지적한 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 독립이 급무다”라는 취지로 역설하였다. 1943년 4월 중순 교토시 사이쿄구 다나카나가하라초 시미즈 에이이치(淸水榮一)의 집(송몽규의 하숙집)에서 송몽규로부터 조선·만주 등에서 민족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한 뒤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이어 “조선의 징병제도는 조선 독립실현을 위해 일대 위력을 가하게 될 것”이라고 논단하였다. 같은 달 하순에는 교토 시외의 야세유원지(八瀨遊園地)에서 릿쿄대학 학생 백인준(白仁俊)에게 “조선인은 종래 무기에 대해 몰랐지만 징병제도의 실시에 따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군사지식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러니 장래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때 반드시 우수한 지도자가 되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함으로써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또한 독립 후의 통치방식에 대해 “조선인은 당파심 및 정의심(情疑心)이 강하므로 독립 초창기에는 군인출신의 강력한 독재가 아니면 안된다”라고 토론하고 독립 실현에 공헌하기 위해 각자 실력 양성에 전념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43년 5월 초순 장성언에게 “조선 고전예술의 탁월함을 지적하고, 문화적으로 침체된 조선의 현상을 타파하고 고유문화를 발양시키기 위해서는 독립을 실현하는 것 밖에 없다”라고 역설하였다. 같은 달 하순에는 “대동아전쟁은 항상 조선독립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해야 하며, 이 기회를 놓치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될 가능성은 없어지고 결국 조선 민족은 일본에 동화되어 사라질 것이므로 끝까지 일본의 패전을 기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943년 6월 하순 송몽규와 찬드라 보스(Chandra Boss)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의 독립운동에 대해 토론하면서, “조선은 일본에게 정복당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바로 찬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지도자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민족의식은 도리어 왕성하기 때문에 언젠가 일본의 전력이 피폐해지고 좋은 기회가 도래한다면 그 때는 찬드라 보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반드시 출현할 것이니 그 기회를 잡아 독립달성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라고 서로 격려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 장성언에게 소장하고 있던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을 빌려주며 조선사 연구를 종용하였다. 1943년 7월 중순 송원휘충에게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견지에 입각해야 한다”라는 취지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일제 경찰의 감시로 1943년 7월 14일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일제 경찰에 붙잡혀, 교토 카모카가와(鴨川) 경찰서에 갇혔다. 1944년 2월 22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 산입)을 받고, 4월 1일 형이 확정되어 교토구치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이후 5월 11일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이듬해인 1945년 2월 16일 사망하였다. 후쿠오카 형무소 수감 당시 일제의 생체 실험으로 사망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사망 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尹永春)이 유해를 인수하여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화장하였다. 장례는 1945년 3월 6일 용정 집의 앞 뜰에서 거행되었다. 광복 후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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