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희
尹奎熙1882. 5. 23 ~ 1927. 7.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안성군 이죽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82년 5월 23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이죽면(二竹面) 죽산리(竹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4월 2일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 만세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서울과 안성 각지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한국이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같은 이죽면 주민 최창혁(崔昌赫)·김용규(金容珪) 등과 함께 4월 2일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죽면 죽산리의 자택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만세시위 당일인 4월 2일 죽산공립보통학교(竹山公立普通學校) 학생 20명을 모아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죽산리의 쌀 시장으로 가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시장 내에 있던 사람들이 합류하여 만세운동의 대열은 1,000명이 넘는 대규모가 되었는데, 이들을 인솔하여 죽산리 일대를 행진한 뒤,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만세운동은 같은 날 오후 8시에 죽산리에서 다시 일어났고, 매산리(梅山里)·용설리(龍舌里)·장계리(長溪里) 등 이죽면의 다른 동리 사람들도 참가하여 2,000명까지 늘어났다. 시위대는 죽산리를 순회하며 이튿날 아침까지 만세를 외쳤다. 이후 일제는 이죽면 일대에서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체포했는데, 이 때 만세운동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 이에 만세운동은 한국인의 당연한 권리이며 보편적 정의·인도의 원칙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그해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 적용은 취소하였으나 형량은 그대로 였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은사령으로 감형되어 같은 해 5월 2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