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안
尹基安1899. 11. 9 ~ 1990. 1.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동군 율리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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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9년 11월 9일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덕안면(德安面) 사대동(四大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이 발생하였을 당시에는 21세로, 평남 대동군(大同郡) 율리면(栗里面) 무진리(戊辰里)에 거주하였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4일에 일어난 대동군 율리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대동군은 평양(平壤)에 군 소재지를 두고 있을 정도로 평양과 매우 인접한 위치에 있었다. 비옥한 곡창지대이면서 기독교 계통의 교회와 사립학교들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서 평양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이 신속하게 전달되고, 실행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던 지역이다. 특히 대동군에서는 군수 및 경찰서장의 연명으로 “한국은 이미 독립되었다”는 허위 문서가 면장이나 이장에게 전달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민심이 더욱 동요하는 형세였다. 율리면에도 평양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기안은 이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고, 일본도 그 주체에 포함되어 있으니 한국도 민족자결의 권리를 획득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평양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데도 일제 경찰이나 군대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한국이 확실히 독립이 된 것이라 여겨 율리면에서도 만세를 외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4일 오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모아 독립이 되었음을 알리고 만세를 불렀다. 율리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의 판결을 유지하였다. 판결 이후 1년 간 옥고를 겪었으며, 풀려난 이후에도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이어나갔다. 광복 이후에는 1953년부터 1970년까지 18년간 서울에서 동아일보 용산보급소(龍山普及所)를 운영하였다. 1970년 이후에는 학교법인 삼산학원(三山學園)을 세우고 정의여자중학교(正義女子中學校)·정의여자고등학교(正義女子高等學校)를 설립하였다. 이후 줄곧 교육사업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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