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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치

尹道致

1856. 1. 14 ~ 1919.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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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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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일(迎日)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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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영일군 청하면 덕성장터(3.22)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56년 1월 14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송라면(松羅面) 하송동(下松洞,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淸河面) 덕성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 덕성장터 만세시위는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영일군 청하면 덕성리(德城里)에서 예수교회 영수직으로 있었던 오용간(吳用干)은 평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소식을 접한 후, 오용간은 만세운동을 일으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침 송라면(松羅面) 대전리(大田里) 교회 영수인 윤영복(尹永福)도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에 발맞추어 만세시위를 전개할 결심을 하였다. 이에 윤영복은 오용간과 교회 교사로 있었던 윤영만(尹永滿)을 만난 자리에서 3월 22일 덕성리 시장의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이들은 오용간의 집에서 만세시위에 사용할 대형 태극기 1개와 소형 태극기 20개를 제작하였다. 오용간·윤영복·윤영만은 3월 22일 만세시위를 함께 이끌 인사들을 섭외하였다. 오용간의 교회에 다니는 신도로 평소 한국 독립을 염원하였기에 3월 22일 덕성시장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오용간의 제안에 찬성하였다. 김윤선(金允先)·이상호(李相浩)·김만수(金萬守)·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역시 오용간의 교회에 함께 다니는 신도로서 만세시위의 취지에 공감하고 참석을 결심하였다. 윤영복 또한 교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 때 만세시위 참석을 적극적으로 수락한 교인들은 교회의 집사인 이준석(李俊石)을 비롯해서 안천종(安千鍾)·안상종(安常鍾)·이영섭(李泳燮)·안덕환(安德煥) 등이 있었다. 3월 22일 윤영만은 오용간에게 연락을 취한 후, 덕성리 시장으로 향하다가 일제 군경에 검거되었다. 일제 군경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는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이준석·안천종·안상종·이준업(李俊業)·이영섭·안덕환·김윤선·이상호·김만수·김유곤·정백용과 함께 오용간과 윤영복으로부터 태극기를 나누어 받았다. 오후 1시 그들과 함께 태극기를 감춘채 덕성리 시장에 갔다. 윤영복은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오용간은 작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그러자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덕성리 시장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제 군경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시위 주도 인물을 붙잡았다. 일제 군경의 체포 과정에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 군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1919년 5월 31일 대구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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