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이
尹福伊1884. 1. 22 ~ 1932. 3.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양산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4년 1월 22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양산읍(梁山邑) 북부동(北部洞, 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31년 4월 4일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이 창립되어 집행위원장에 이귀운(李貴云), 집행위원에 박무실(朴武實)·박금준(朴今俊)·김희수(金喜洙) 등이 선임되었다. 1932년 2월 무렵에는 회원이 300여 명 정도였다. 이 당시 양산읍 북부동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던 중 양산농민조합 양산읍 연락책임자가 되어 조합원 규합에 적극 참여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의 제3회 정기총회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 기타 공과금 지주 부담, 소작료 4할’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뒤 양산농민조합 간부들이 상북면(上北面) 석계리(石溪里), 대석리(大石里) 등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활동을 강화하였다. 이에 양산경찰서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같은 해 3월 15일부터 대대적인 검속에 나서 청년부장 이봉재(李鳳在) 등 총 18명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였다. 그 중 10명은 벌금형에 처하고, 나머지 8명은 구류처분을 내려 양산경찰서에 유치하였다. 유치장이 협소하자 3월 17일 부산형무소로 이송하려 하였다. 이러한 양산경찰서의 부당한 조치에 격앙한 양산농민조합원 300여 명과 함께 3월 16일 밤 9시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여 조합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경찰서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돌을 던져 경찰서 창문을 부수고 “경찰서를 파괴하라”, “순사를 죽여라”고 외치며 거세에 항의하였다. 일제 경찰은 공포탄을 쏘아 위협했으나 시위대는 오히려 더 격앙되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양산경찰서 서장 미츠유키 쇼유(光行處雄)가 실탄을 발포하였다. 이때 오른쪽 어께에 관통상을 입고 약 5시간 후인 다음 날 3월 17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에 양산농민조합원은 일제의 무고한 탄압에 맞서 17일 새벽 다시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일수⋮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