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又烈
尹又1904 ~ 1927. 5.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구제4청년회
- · 대구노동공제회
- · 대구청년동맹
- · 경북사회운동자동맹. 자유노동자조합
- · 철성단
- · 조선청년총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조선노농대회
- · 허무당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남산정(南山町)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6년 당시 22세인 것으로 보아 1904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으로 윤창섭(尹昌燮)을 사용하였다. 서울에서 중동학교(中東學校)를 다니다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과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속성과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여름에 귀국하였는데 학창시절부터 제국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무정부주의·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정부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이론에 정통하고자 했으며, 한편으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 인맥을 늘려나갔다. 1924년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대구에서 제4청년회(第四靑年會) 조직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청년층의 단결과 교육훈련을 목표로 삼은 제4청년회는 일반대중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노동·농민·부인·형평·소년운동 등을 적극 지원해 나갔다. 이후 대구와 경북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단체인 대구노동공제회(大邱勞動共濟會),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 경북사회운동자동맹(慶北社會運動者同盟), 자유노동자조합(自由勞動者組合), 철성단(鐵城團) 등에서 활동하며 대구·경북지역 사회운동을 선도하였다. 또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전국적으로 입지를 넓혀나갔으며, 조선노농대회(朝鮮勞農大會) 노총분규사건(勞總紛糾事件) 준비위원을 맡으며 노동단체 및 농민단체간의 대립을 극복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허무당선언서(虛無黨宣言書)’를 발표하였다. 1925년 4월 곽철(郭澈) 등이 무정부주의를 주창하며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대거 검거되자, 동지를 다시 규합해가며 일제에 대한 무력행사를 계획하였다. 직접적 파괴행동을 통한 혁명을 구상하고, 먼저 일본제국주의체제의 부당성과 식민지 현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이런 취지로 작성된 것이 ‘허무당선언서’였다. ‘허무당선언서’에서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이중삼중으로 폭악한 적의 박해를 받고 있으며 (중략) 착취와 학대와 살육과 조소와 모욕이 있을 뿐인 암흑한 수라장”이라고 정의하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를 압제하고 있는 일제에게 “불안과 공포로서 신음하고 있는 이때에 폭파·방화·총살의 직접 행동을 주장하는 허무당이 분기하였다”며 경고하였다. 1925년 12월 대구의 자택에서 원고를 탈고한 후, 서울로 올라와 1926년 1월 3일 서울 서대문 조선청년총동맹사무소와 한성강습원(漢城講習院)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선언서 약 200통을 인쇄하였다. 이후 선언서를 경성부 계동(桂洞) 전일(全一)의 집으로 옮겼다가 우편으로 신문사·은행·잡지사 등 전국 각지 및 일본으로 발송하였다. 그 후 동지 양명(梁明)·이윤재(李允宰) 등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1926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 1926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6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취하되어 옥고를 겪었다. 감형되어 1927년 2월 7일 출옥하였으나 폐렴으로 같은 해 5월 2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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