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時淵
時淵1874. 1. 1 ~ 1914. 1.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권세연 의병부대
- · 유시연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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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74년 1월 1일 경상북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현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현 수곡리) 대평리(大坪里)에서 아버지 유정호(柳正鎬)와 어머니 함안 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號)는 성남(星南)이고 자(字)는 박여(璞汝), 혹은 응만(應萬)이다. 이명으로는 시연(時然)·승일(承一)·시영(時榮)·시종(時宗)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어려서 마을의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삼종형(三從兄) 유연각(柳淵覺)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양반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평소 소위 세족(世族)이라 하는 자들은 영리만을 취하고, 사림(士林)이란 자들은 한갓 허위만 숭상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이로 인해 당시 일본의 침략에 처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던 중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 1월 21일 권세연(權世淵)이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소모장(召募將)을 맡아 안동과 인근 지역에서 의병의 모집과 군기 확보 등의 활동을 하였다. 특히 같은 해 2월 25일 아직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청송군(靑松郡)에 부대원 3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모병과 군기를 확보하는데 노력하였고, 이러한 활동은 청송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자극제가 되었다. 김도화(金道和)를 중심으로 부대가 다시 재편되면서 선봉장(先鋒將)의 직책을 맡았다. 1896년 3월에 풍기(豐基, 현 영주시 풍기읍)·순흥(順興, 현 영주시 순흥면)·영천(榮川, 현 영주시)·봉화(奉化)·선성(宣城, 현 안동시 예안면) 등에서 활동했던 부대와 연합하여 함창(咸昌) 태봉(胎峰, 현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수비대의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그 해 3월 26일 1차 공격 이후 같은 달 29일 연합한 의병부대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대구 주둔수비대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은 일본수비대와 9시간이 넘는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29일 밤 예천(醴泉)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당시 일본 수비대는 남은 의병부대를 계속 추격하여 소탕하고자 같은 해 4월 2일 안동부(安東府)를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태봉전투 이후 의병부대는 인적·물적으로 큰 곤경에 처하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부대 재정비를 모색하던 중 남한산성에서 관군에 패해 단양(丹陽)·풍기·영천 등을 거쳐 안동방면으로 이동했던 김하락(金河洛) 부대와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감하락 부대와의 연합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이어 영양(英陽)과 영덕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도현(金道鉉) 부대와의 연합을 재차 모색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점점 더 부대를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더욱이 1896년 8월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효유가 내려오자 인근 지역의 의병부대가 하나 둘씩 자진 해산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의병부대를 유지하지 못하고 해산하게 되었다. 의병부대 해산 이후 고향인 수곡에 돌아와 지내던 중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계기로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영남 각 지방을 돌면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독려하였고, 1906년 봄 경주(慶州) 분황사(芬皇寺)에서 10개 읍의 의병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총대장인 영남의병대장(嶺南義兵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8년 5월까지 안동 임동면을 중심으로 영덕·봉화·예안(禮安, 현 안동시 예안면)·진보(眞寶, 현 청송군 진보면 일대)·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경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자 인근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였다. 박처사(朴處士)로 알려진 박인화(朴仁和), 영덕의 신돌석, 영양의 김성운(金成雲義) 등과 긴밀히 연계하며 연합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 이후에는 관동(關東)방면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이강년(李康秊)부대와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7년 2월 박처사의 부대와 호응하여 예안 분파소(分派所)를 공격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진보군(眞寶郡) 기곡(基谷, 현 청송군 진보면 기곡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1908년 1월에는 주둔하고 있던 길안(吉安) 금곡(金谷, 현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에 접근해 오던 일본군을 두 방면에서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점차 거세지자 그 해 2월 이후 영양 일월산(日月山) 일대로 근거를 옮겨 활동하였다. 일본군 토벌대에 대응하여 산악지형과 겨울이라는 계절적 장점을 이용해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28일 안동군(安東郡) 임동면 대전(大田) 부근의 봉황사(鳳凰寺)에서 부대원 43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당했다. 이후 더욱 거센 일본군의 토벌활동으로 근거지를 상실하고 지속적인 피해로 인해 활동이 크게 제약되었고, 결국 그 해 5월에 부대를 해산하였다. 1908년 10월 중순 안동군 고천동(高川洞, 현 안동시 임동면 고천리)에 은신하고 있다는 토벌대의 보고가 있었다. 또 1910년 2월 안동경찰서장의 보고에 따르면, “일시에 종적을 감추어 바다를 건넜다(洋行) 또는 사망했다는 풍문이 도는 수괴(首魁) 유시영(柳時榮)은 눈앞의 의식(衣食)이 궁핍하고 부하 1인도 없이 보통 한복(韓服)을 입고 2~3책의 서적을 보자기에 싸서 휴대하고 진보·영양의 양 군을 배회고 있다는 형적(形跡)을 조사 중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를 피해 대구(大邱)·부산(釜山)·인천(仁川)·경성(京城) 등 전국 각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은신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 8월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 많은 안동 출신들에 의해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고 있었던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들을 목도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기 구입 등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이에 무기 구입 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1912년 다시 국내로 들어와 안동군 북선면(北先面) 이계동(伊溪洞, 현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이하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경찰의 수색이 심해지자 진보군 북면(北面, 현 영양군 입암면) 김사평(金沙坪)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면서 비밀리에 동료 조박용(趙博容)·구석규(具錫圭)·유명호(柳命鎬)·김두진(金斗鎭) 등과 같이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음)4월 20일 또 다른 동료 이세명(李世明)과 함께 유연박(柳淵博)·유동시(柳東蓍)를 찾아가 20원을 지원받았다. 같은 해 5월 25일 임남면(臨南面) 지례동(知禮洞, 현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의 김두환(金斗煥)과 동생 김벽환(金壁煥)으로부터 74원 10전의 군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0일 영양군(英陽郡) 동면(東面) 대천동(大川洞, 현 영양읍 대천리)에 사는 김낙현(金洛顯)에게 525원 60전 등, 600원 가량의 군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은 군자금을 지니고 가족과 함께 다시 서간도 갈 계획을 수립하고 안동군 북후면(北後面)과 영천군 수도리(水島里, 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를 거쳐 가다가 처자(妻子)의 병으로 영천군 박봉이(朴鳳伊)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던 중 그 해 7월 27일 밀정의 신고를 받은 영천경찰서 형사에게 영천군 반송시장(盤松市場, 현 영주시 문수면)에서 붙잡혔다. 이후 1913년 9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 및 강도상해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상고가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4년 1월 29일 대구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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