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술
金己述1887. 12. 20 ~ 1940. 1.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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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4) 1887년 12월 20일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서수면(瑞穗面, 현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瑞穗里)에서 태어났다. 1927년 8월에서 11월 사이 주식회사 이엽사(二葉社) 서수농장(瑞穗農場)의 높은 소작료(小作料)에 항의하는 소작쟁의(小作爭議)에 참여하여 주재소 습격 등을 감행하였다. 이엽사(二葉社)는 일본인 지주 시라세이(白勢春三) 등이 중심이 되어 1926년에 설립한 전형적인 식민 농업회사로서 본점은 전주(全州)에 있었다. 1927년경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농장(參禮農場), 익산(益山)의 황등농장(黃登農場), 옥구의 서수농장 등 3개의 농장에 총 1,200정보(町步)의 땅을 확보하고, 이를 1,700여 명의 한인 소작인들에게 경작시켰다. 옥구의 서수농장은 일본 니가타현(新潟縣) 출신의 지주들이 1905년 설치한 가와사키농장(川崎農場)을 인수하여 설립한 공동 경영의 대농장이었다. 그런데 이 농장에서 지나치게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하자, 농민들이 이에 맞서 강력한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1927년 추수기를 맞아 이엽사 농장에서 75%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를 현물(現物)로 납입할 것을 통보하자, 장태성(張台成, 일명 張公郁)·김행규(金幸奎) 등 옥구농민조합(沃溝農民組合) 서수지부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소작료율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농장주들은 소작료뿐만 아니라 종자대·비료값·농기구 사용료·수리조합비 등 일체를 소작농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75%의 소작료는 사실상 생산량 전부를 거둬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농장 소작인들도 도조(賭租) 불납(不納) 통지를 농장 측에 발송하는 등 단합된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인 농장 측은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였으며, 일제 경찰은 11월 25일 장태성 등 주요 간부들을 구금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한 500여 명의 소작인은 옥구농민조합 간부의 검거에 항의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 습격하여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은 군산경찰서로 압송되던 장태성이 임피경찰관출장소(臨陂警察官出張所)에서 열차 대기 중임을 알고 출장소로 몰려가 장태성을 구출하였다. 그리고 조합 간부 박상호(朴相浩)가 서수경찰주재소에 붙잡혀 있음을 알고 곧바로 박상호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함께 주재소 습격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제 당국은 이들마저 검거하였으나, 부타바샤 소작쟁의는 농장의 소작인 외에 군산 지역 노동자와 학생들도 합세하여 더 확대된 시위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주재소 습격 소식을 들은 군산경찰서에서는 곧바로 경관대(警官隊)를 파견하여 80여 명의 조합원과 농민 등을 검거하였다. 이때 함께 붙잡혀 같은 해 12월 8일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소요 및 구금자 탈취죄로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8년 2월 29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신문관(申文官)·한기석(韓箕錫) 등과 함께 징역 1년 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당시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이 생긴 이래 소작쟁의 사건으로 30명이 넘는 인원이 기소된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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